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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Nov 29. 2023

5.문종은 왜 신기전을 만들었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5.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문종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 문종은 잘 알려지지 않은 왕입니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을 이룬 세종 시대의 마지막 10년은 대부분 세종과 문종이 거의 하나가 되어 진행 시킨 업적이었다는 것 알고 계셨나요? 이렇게 중요한 인물인데도 짧은 재위 기간과 이후 안타까운 사건들로 인해 그 공로가 묻혀버린 것이 너무나 아쉬운 왕입니다. 문종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고 왜 신기전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만들게 되었을까요? 잘 알려지지 않은 문종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준비된 왕     


 세종 대왕과 소헌왕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문종은 1421년 (세종 3년) 8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아버지인 세종도 셋째아들, 할아버지 태종도 다섯째 아들이었으니 조선이 세워지고 처음으로 장남이 세자의 자리에 책봉되었다가 왕이 된 경우입니다. 처음으로 세자 교육을 받았던 이방석은 왕자의 난으로 죽고, 그다음 세자인 양녕대군은 쫓겨났으니, 정식으로 세자 교육을 받고 왕이 된 건 처음이었죠. 게다가 8세 세자로 책봉되고 37세에 왕이 되면서 29년간이나 세자로 살았으니, 조선의 왕 중 가장 오랜 기간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세자가 되면 지금의 고3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왕이 되기 위한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루 종일 최고의 학자들과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평생을 공부한 신하들과 토론에서 밀리면 안 되는 자리다 보니 보통 사람이라면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문종은 아버지인 세종보다 더 뛰어난 인재였는데 공부를 좋아하기로 소문난 아버지보다 더 공부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인성과 효성까지 뛰어나 도저히 흠을 잡을 수 없는 완벽한 세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도한 업무로 몸이 점점 나빠지고 있던 세종은 아들을 믿고 왕의 업무를 나눠주게 됩니다. 대리 청정을 하고 후반에는 거의 문종이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게 된 것은 완벽주의자 세종의 신임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국방 분야 전문가, 문종     


 문종이 가장 관심 있던 분야는 군사와 무기 등 국방 분야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 가장 민감한 문제는 군의 체계를 잡는 과정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병권을 총괄하며 요동 정벌이라는 무리한 계획을 세웠는데 겉으로는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군제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종친과 공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사병 세력을 견제하고자 함이었죠. 그리고 병권의 결정권을 재상에게 주어 움직이게 하려고 했으니 이방원 입장에서는 찬성할 수 없어서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앙집권화를 위해서는 사병을 혁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태종 이방원은 사병 혁파를 하고 군사 체계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문종 때가 되어서 [오위진법] 이라는 병서가 만들어지게 되고 조선 시대 군의 통수 체계가 정리되었고 전투조직을 완성하게 됩니다. 조선 초, 국방력의 안정은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종이 세자 시절부터 더욱 관심을 가지던 분야였기 때문에 더욱 빠르게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종의 관심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실록에 보면 신하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에 주제 도서를 정할 때 병서로 하자고 했다는 기록이나 병기(무기) 제조 공장이 많으니 줄이자는 의견에 반대했다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문을 팽개치고 무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상소가 올라올 정도로 군사력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의 유명한 업적인 4군 6진도 문종이 대리청정하던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니 세종이 시작해서 문종이 마무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특히 조선 전기 화약 무기들의 집대성인 화차의 제작에 문종의 아이디어가 더해지게 되는데 각도를 조절해 발사 거리를 조정하여 멀리까지 쏠 수 있게 만든 세계 최초의 로켓 신기전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각종 무기 개발, 사용 방법 고안과 연습, 기병과 보병들의 환도 길이 규정 등 전문적인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하죠. 


-안타까운 인재의 죽음    

 

 이렇듯 29년간 세자로 지내며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던 문종이 조선의 왕이 된 후 조금 더 길게 살아 조선의 시스템을 안정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안타깝게도 어린 아들 단종을 남겨두고 죽게 되면서 그 희망은 사라지게 되었죠.    

 

 완벽한 왕에게 없었던 한가지는 부인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문종의 결혼 생활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기도 하죠. 문종의 어진이 남아있지 않아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어린 시절 기록을 보면 중국의 사신들이 문종의 외모를 칭찬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외모가 옥처럼 곱고 예의 바르다면서 조선은 산수가 좋아 저런 아름다운 인물이 나온다고 하고 손을 잡고 차를 마시고 어린 문종을 안아 말에 태우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문종은 공부와 무기와 일에만 관심을 쏟았던 건지 부인과 후손이 많았던 아버지 세종과는 달리 여인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문종의 사랑을 받고 싶어 이상한 주술을 쓰다가 쫓겨나기도 했고 두 번째 부인은 외로운 나머지 궁녀에게 집착하다가 쫓겨나기도 하죠. 그래도 다행인 건 후궁 중 그나마 얌전하고 참한 여인이 있어서 세 번째 세자빈으로 들이고 아들까지 낳게 되는데 그 아들이 바로 단종이었지요. 하지만 여기까지가 문종의 마지막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단종을 낳자마자 세자빈은 죽고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게 되는데 조선의 왕 중 유일하게 부인이 없이 지낸 왕이 되었죠.  

    

 그러나 이 결정은 어린 단종에게 비극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됩니다. 일에만 집중했던 문종은 몸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어머니인 소헌왕후가 돌아가시고 효심을 다해 삼년상을 치르면서 몸이 더 상하게 되고, 아버지 세종이 연달아 돌아가시며 다시 삼년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유교의 나라에 맞는 유교 예법을 정리해 놓은 아버지의 뜻을 지키고 싶었던 문종은 몸을 돌보지 않고 연이은 삼년상을 치르게 되며 건강을 잃게 되었죠. 그렇게 왕이 된 후 2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을 남기고 죽음에 이르러 어린 단종에게 왕위를 넘기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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