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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Nov 29. 2023

세종의 인재들 황희와 장영실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세종의 인재들 1. 황희     


 세종과 함께 일한 대표적인 영의정 하면 황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황희가 14살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14살이면 고려 우왕 때였는데 음서를 통해 일을 시작했고 나중에 과거를 본 후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희는 갑자기 실직하게 되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다른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건국을 반대하며 관직을 그만뒀는데 황희는 아무래도 평생 일을 해야 할 능력자였나 보아요. 태조가 황희를 불렀고 소신 발언을 자주 하던 황희는 매번 잘리고도 곧 다시 복직하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조금씩 높은 자리로 올라가던 황희는 태종 이방원의 눈에 들게 됩니다. 지신사 (도승지) 왕의 비서 역할을 하며 가끔 이 사람은 어떻고 저 사람은 어떤지 물어보는 태종에게 솔직하게 말했는데 이에 원한을 품은 사람이 생겨서 논란이 생기고 황희는 죄송하다면서 사직을 하는 일이 생기게 되죠. 하지만 전화위복이었습니다. 황희의 소신이 마음에 든 태종은 더 큰 권한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형조판서(법무부 장관)를 시작으로 육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게 되었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416년, 소신 발언은 태종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세자인 양녕대군을 감싸달라 말했다가 다음 정권을 대비하고 있냐는 오해를 받고 남원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관직 생활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태종은 죽기 직전 황희를 부릅니다. 아무래도 자네가 없으면 안 되겠다고 세종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죽게 되었죠.      


 세종은 너무 힘든 상사였습니다. 늘 넘치는 아이디어로 신하들을 불러 지칠 때까지 토론하고 또 토론하며 그 아이디어를 당장 실행할 수 있도록 닦달했지요. 그때마다 황희는 조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곧 손발이 척척 들어맞기 시작했죠. 세종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너무 막 나간다 싶을 때는 서로 눈빛 교환을 하며 멈추지 않았을까 하는 장면들을 상상해 봅니다.      


 사실 황희는 비리 사건에 연루된 적도 있었습니다. 나라가 들썩일 만큼 큰일이었지만 세종은 황희가 없으면 불안해했죠. 그래서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 3년 상을 치러야 했을 때도 3개월 만에 고기를 보내며 올라오라 했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사직을 권하니 재택근무를 권하며 함께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세종은 왜 이렇게까지 황희와 일하고 싶었을까요? 아마 황희와 함께 중요한 일들을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황희는 본질을 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실행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고 있었고,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현실적인 감각이 있었다고 하죠. 높은 꿈을 꾸었던 세종과 그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황희의 능력이 필요했던 거죠. 


결국 그들은 많은 걸 이루어 냅니다. 14살에 관직 생활을 시작한 황의는 87세까지 일하고 다음 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세종 대왕의 업적이 대단하지만, 그 모든 걸 함께한 황희도 같이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종의 인재들 2. 장영실


 장영실은 어린 시절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만들어 보기를 좋아했었는데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원나라 출신이던 아버지가 기계 제작 분야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 볼 수 있죠. 장영실이 살던 마을에 가뭄이 들어 논에 물이 부족해지자 물을 댈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들었고 이것이 소문이 나 관리의 눈에 들어 궁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야사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장영실이 태종의 눈에 들었고 세종을 만나게 되었지요.   

  

 세종 3년 (1421년) 장영실은 중국에 파견되는데 세종은 장영실이 천문시설을 시찰하고 와서 이를 조선에 재연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장영실은 천문 관측시설과 과학문물 등의 서적을 수집하여 이듬해 귀국했다고 하죠. 이후 장영실은 천문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수학과 설계를 담당하는 이론팀과 제작을 담당하는 실무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장영실은 실무팀장 이천의 부서에 소속되어 각종 천문 기기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었지요.     


 장영실은 천문관측의 기본이 되는 대간의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 종묘 앞에 설치되어 공중 시계 역할을 한 앙부일구(해시계), 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영실이 세종의 신뢰를 받은 건 바로 자격루의 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문을 관측하지 않고도 만들 수 있는 시계, 갱점지기는 수동 물시계였는데 물이 떨어지며 시간을 정확하게 잴 수 있었지만, 사람이 보고 있다가 시간을 알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습니다. 깜빡하고 타이밍을 놓치면 관리자들이 벌을 받아야 했기에 불만이 많았죠.


 그래서 장영실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동 시보장치를 개발하게 됩니다. 장영실은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호군이라는 관직을 받고 이후 종3품 대호군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장영실은 갑작스러운 가마 사건에 휘말려 사라지게 됩니다. 임금님이 타시기도 전에 가마가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지만 이 사건으로 장영실은 기록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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