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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소장 Dec 06. 2023

8. 예종은 왜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갑작스러운 세자 책봉      


 예종은 세종 대왕의 둘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세조)과 정희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도 왕이 아니고 형도 있는 상황에서 태어났지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아 단종을 밀어낸 후 왕위에 오르면서  해양 대군에 봉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인 의경 세자가 19세에 갑작스럽게 죽으며 해양 대군은  왕세자로 책봉되었죠.      


 3년 후인 1460년(세조 6년)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여 1년 후 원손인 인성 대군을 낳았지만, 세자빈은 산후병으로 죽고 인성 대군도 얼마 살지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지만 이때 한명회의 딸이었던 장순왕후와 인성 대군이 살아있었다면 역사는 또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2살에 아이를 가진 예종 이야기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사실이라고 하네요.)     


 차근차근 세자 수업을 받고 있던 예종은 15세가 되어서는 직접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매일 아침 편전에 나가 신하들이 임금에게 나랏일을 고하는 조계에 참석해 현실 정치를 배우게 되죠.


 이때 예종은 세자로서 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신들은 말 잘 듣는 모범생 왕으로 예종을 기대하고 있었죠.


 하지만 세조가 죽고 왕위에 오른 예종은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태도를 돌변하게 됩니다.     


-왕이 된 예종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 시대에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세조는 단종을 죽인 이유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왕권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재상에게 힘이 가는 의정부서사제를 없애고 육조직계제를 시행하며 권력을 다시 왕에게 집중시켰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신들의 힘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세조를 반대하고 단종을 세우려는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신들이 차고 넘쳤고, 그들에게 땅과 권리를 몰아주며 고려말, 권문세족이 판을 치던 그 시절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죠.


 가장 힘이 비대해진 것은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 세력들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견고해져서 왕이 통제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되고 있었습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가장 먼저 아버지인 세조의 묘호와 시호를 붙이는 일로 꼬투리를 잡았고 대신들은 당황했습니다. 보통 ‘조’는 태조처럼 나라를 세우거나 위기를 극복한 왕에게 붙이는 것인데 신하들이 신종, 예종, 성종 중 택하라는 의견을 내자 아버지는 나라를 다시 이룩한 공덕이 있다면서 세조라는 묘호를 붙이자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시호는 선대왕들과 마찬가지로 8자로 제한했는데 글자 수의 제한을 두지 말 것을 주장해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대왕으로 스무 자 시호를 받게 되었죠. 이때까지만 해도 대신들은 예종의 효심이 지극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종의 왕권 강화는 계속되었죠.     


-전설이 된 남이장군     


 남이장군은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의 아들로 스무 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건주여진 정벌에도 공이 큰 뛰어난 무장이었습니다. 좋은 가문에 실력까지 뛰어나고 공까지 세운 남이장군은 세조의 총애로 27세에 병조판서에 오르는 등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가 남이장군을 초고속 승진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너무 커져 버린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조는 남이장군과 함께 세종의 4남 영응대군의 아들 구성군 이준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어 이들은 한명회, 신숙주 등 구공신 세력을 견제한 신공신 세력이라 불리기도 했지요.      


 그러나 예종은 남이장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도 강직해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남이장군을 질투했는지 신공신을 견제한 구공신들이 찾아와 남이장군은 병권을 맡기기에 사람됨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남이장군을 해임하게 되는데 이날은 예종이 즉위한 첫날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남이장군은 구공신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려 유자광을 찾아가게 되지만 오히려 유자광은 예종에게 남이장군이 역모를 하려 한다고 모함하게 되고 남이장군은 궁궐로 잡혀가 국문을 당하고 결국 죽게 되었지요.


 이 일로 신공신 세력들은 힘을 모두 잃게 되고 예종이 죽고 난 후 어린 성종이 즉위하면서 이젠 그 누구도 막기 어려운 구공신들의 세상이 되었지요.      


 남이장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백성들이 많았는지 수많은 전설이 생겨났습니다. 남이장군이 여자 귀신을 쫓아버린 이야기 등 각종 전설이 생기고 그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들도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남이섬에 가면 남이장군의 시비와 묘역이 있는데 실제로 남이장군의 묘는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고 합니다.     


-예종의 죽음


 신공신 세력이 와해 되고 권력을 장악한 대신들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세조실록>의 사초를 쓰던 민수라는 사관이 자기 이름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 미리 제출한 사초를 몰래 빼내 수정하려고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민수가 고치려던 내용은 한명회와 신숙주에 관한 것이었는데 지금 최고 자리에 있는 권세가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들통나게 되고 예종 앞에 불려 온 민수는 재상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말을 남깁니다.


 예전에 태종이 말에서 떨어졌을 때 사관에게 적지 말라고 했던 내용을 적어두었을 만큼 사관의 소신이 중요했는데 이 사건으로 당시 왕보다 높은 권세를 가진 것은 한명회를 비롯한 구공신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하지만 이렇게나 해결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예종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세자 시절부터 앓던 족질이 재발해 병세가 갑자기 나빠지게 된 것이죠.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공신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예종이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조선이 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갔을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공신 세력과 사림이 조화를 이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모르는 일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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