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소장 Dec 21. 2023

13. 명종은 왜 힘이 없었을까?

조선 왕에 관한 27가지 궁금증

-명종은 왜 힘이 없었을까?     


 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2살에 왕이 된 명종, 약 22년의 재위 기간으로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건 명종보다 엄마인 문정왕후와 윤원형 정난정 등 그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권력자들이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된 건지, 명종 시대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경원대군 시절-     


 1534년 문정왕후는 35세, 당시로서는 아이를 낳기 늦은 나이에 명종(경원대군)을 낳게 됩니다. 물론 첫 출산은 아니었고 위로 누나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을 수 있었지만, 명종이 태어났다고 왕을 꿈꾸기엔 무리한 상황이었죠.


우선 인종은 20살이었고 정통성에 문제가 없었던 왕세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과 인성이 뛰어나 당시 신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원대군이 태어났다고 바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종도 나이 차이 나는 아들뻘의 동생을 예뻐해 주었죠.    

  

경원대군의 어린 시절에 관한 사건이나 이야기는 많지 않아서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저 중종의 아들, 왕세자였던 인종의 아우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나라의 근본, 국본인 세자에게서 아들이 나오지 않자, 신하들 그리고 문정왕후는 경원대군에 대한 기대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경원대군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병인 안질을 겪고 있다는 이유로 왕이 되기엔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이나 왕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었죠.     


 하지만 인종이 죽게 되자,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 권력을 가진 이들이 경원대군을 왕의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망가져 버린 조선의 시스템-     


명종이 12살 어린 나이였기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렴청정이었죠.


 성종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지만 직접 조정에 나서진 않고 뒤에서 큰 결정들만 도왔습니다. 말 그대로 성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뒤에서 배경이 되어주었던 것인데 문정왕후는 직접 발을 드리우고 조회와 경연에 참석합니다.


 물론 문정왕후가 유교를 알던 인텔리였다고는 하지만 조선이 정상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면 외척의 간섭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세력의 등장은 그들의 잘못이기보다 이미 오랜 시간 곪아왔던 염증이 고름이 되어 차고 넘쳐 이 시기에 흐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국 이래 왕권과 신권의 다툼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죠.    

 

 조선이라는 시스템을 구상했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꿈꾸던 정도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건 강한 왕권을 꿈꾸며 독재한 태종 이방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세종과 문종으로 이어진 성군 패밀리는 다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의 시스템을 만들며 조선을 성장시키고 체계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문종의 죽음 이후 어린 단종이 즉위하며 조선의 위기는 시작되었죠.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았던 시기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었을 텐데, 아쉽게도 그리되지 않았습니다.      


문종의 동생 수양대군은 계유년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단종을 죽였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조선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한 수양대군과 정난 공신들은 기득권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상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시작한 조선은 그렇게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유학 군주였던 성종이 왕이 되며 경연을 부활시켰고 사헌부와 대간들이 힘을 얻었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연산군 대에 이르러 역효과를 일으키게 됩니다. (물론 연산군이라는 변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종은 폭군이었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반정을 주도한 세력들이 연산군을 몰아낸 이유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들까지 화가 미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기에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부분이 반정에 참여해 다시 그 자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중종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오른 것이고 왕권은 약해졌죠. 그런 이유로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해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시도 했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이제 조선 초기의 건강한 시스템은 여러 사건을 겪으며 변하고 있었고 나라를 위한 관리는 힘을 잃고 세력을 잡은 이들의 싸움이 되었죠.


그나마 정통성을 가진 인종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성리학 질서가 다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선은 그토록 막고 싶었던 외척이 권력을 잡게 되며 또 한 번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을사사화-     


인종이 세자이던 시절 외숙부 윤임(장경왕후)을 중심으로 한 대윤 세력과 경원대군의 외숙부 윤원형(문정왕후)을 중심으로 한 소윤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리고 8개월의 짧은 재위 기간으로 인종이 죽고 경원대군이었던 명종이 조선의 13대 왕으로 등극하자 윤임, 유관, 유인숙 등 대윤과 관련된 자들이 대대적인 숙청을 겪게 되니 조선 4대 사화 중 마지막인 을사사화입니다.


 경원대군이 안질을 겪고 있어서 왕이 되기 적합하지 않기에 다른 종친을 세우려고 했다는 이유였죠.


 인종이 죽을 당시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의 양자 계림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을 만들어 대윤을 몰아내고 그들을 따르던 사림은 유배 보내지게 되었죠. 이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재역 벽서사건이 발생하는데 지금은 과천시에 해당하는 양재역에서 실권을 장악한 윤원형과 문정왕후를 비판하는 벽서가 발견됩니다.


 그 중 ‘여주가 나라를 망친다’는 내용은 문정왕후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이었죠. 이를 핑계로 문정왕후는 대윤의 나머지 세력들까지 숙청하게 되고 사림을 견제하며 측근 정치를 시작하게 되죠.     


-문정왕후-      


 조선 시대 왕비 중 당시 선비들에게 가장 미움받았던 주인공은 바로 문정왕후입니다. 성리학자들이 그토록 견제했던 외척 세력이기도 하고 측근 정치를 통해 그 권력이 비대해지고 부패해지고 수령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미웠겠지만,


가장 미움을 받은 부분은 불교를 되살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시대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문정왕후 개인적으로는 정치력과 결단력이 있었고, 사서와 경전을 통달한 유교 인텔리로 추진력이 있고 논리적으로 밀리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건국 이래 최강의 권력을 가졌던 왕비였지만 죽고 나서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인물이기도 했죠.     


한편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문정왕후의 불교 되살리기는 나라가 어려워져 도망가는 백성들이 불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 승려 신분제인 도첩제를 부활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전국 300여 개의 사찰 건립을 승인하고 총애하던 승려 ‘보우’를 봉은사 주지에 앉혀 권력을 준 점 등 더 연구해 봐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문정왕후를 싫어했던 사림들이 그녀의 사후 과하게 비난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윤원형과 정난정-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남동생으로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며 힘을 잃었지만, 인종이 8개월 만에 죽게 되자 다시 관직에 오르고 을사사화 이후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최고의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는데 당시 뇌물로 받은 쌀이 썩어 유기그릇으로 대체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한양에만 저택이 15채나 있었다고 합니다. 노비의 수도 많고 간척 사업을 진행해 땅을 자기 사유지로 사용하는 등 횡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 대간들의 상소가 계속 올라오게 되었지만, 명종은 이를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명종은 내시에게 “외척이 대죄를 입으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는데 이미 내시들을 모두 포섭하고 있던 윤원형의 귀에 들어가 문정왕후가 찾아와 주상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데 이런 말을 하느냐며 나무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렇게 왕보다 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고 명종이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자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사림의 탄핵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그가 사랑하던 여인 정난정

 ( 첩으로 정실부인을 독살했다는 의혹도 있고, 윤원형이 부정부패하는데 옆에서 더 부추겼다고 전해지는 ) 이


 지나가던 금부도사를 보고 자기를 잡으러 오는 것으로 착각해 자결하자 윤원형도 뒤를 이어 자결했다고 합니다.  

    

-명종 마지막-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실정으로 재정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 조선은 윤원형 등의 측근 비리로 결국 파산 지경에 이르고 1550년(명종 5년) 더 이상 줄 토지가 없어 직전법을 폐지하게 됩니다.


 또한 1555년 (명종 10년) 왜구가 전라도 서남 해안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강간, 약탈, 살인을 자행한 을묘왜변을 겪게 되는데 삼포왜란(중종) 이후 생겨난 비상 기관인 비변사는 이때부터 국가 전반의 위기를 다루는 상설 정치기구가 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수군을 크게 강화하고 판옥선을 도입, 총통 개량, 수군 정비 등을 하면서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림들은 명종의 이런 개혁을 좋아하지 않았죠.      


그리고 명종은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왕비인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하게 되는데 이량은 기대와 달리 자기 세를 불리는 데만 급급해 명종의 계책은 실패하게 됩니다. 게다가 이량은 자기 외조카인 심의겸을 비롯한 다른 외척을 해치려다 열받은 명종에게 윤원형보다 먼저 숙청되었다고 합니다.      


명종은 왕비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순회세자를 낳았지만 1563년 (명종 18년) 12살이던 순회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으며 조선의 14번째 왕은 중종의 후궁이던 창빈 안씨의 아들 덕흥군의 아들인 하성군이 이어받게 됩니다.


외가의 힘이 막강하지 않은 하성군의 등장은 무수한 사화를 겪고도 살아남은 사림들의 세상을 만들게 되죠. 어찌 보면 약해질 수 있는 왕권이었지만 문정왕후 사후 2년간 등장한 인재들은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게 되죠. 단, 조선 최고의 위기인 임진왜란도 겪게 되겠지만요.

매거진의 이전글 12. 인종은 왜 굶어 죽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