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뽀리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첫 체험학습 날. 7월 그날은 하늘은 맑고, 햇빛은 뜨겁다. 차에서 내려 아이들의 무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교복을 입은 수백 명의 아이들이 새무리처럼 모여 있다. 이제 갓 중1이 된 앳된 모습에 화장기도 거의 없고 나름 긴 교복치마를 입고 있는 아이들. 어떤 아이도 친구를 왕따 시킬 것처럼, 괴롭힐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많은 아이들 속에 뽀리를 찾고 담임선생님께 인사를 한 후 빠져나왔다.
하루와 찰나의 순간으로 이렇게 공기가 달라질 수 있을까? 바로 전날 체험학습 장소를 찾아가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다가 결국 아이는 울면서 5월 초부터 무리에서 왕따를 당했고 혼자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2달간 점심도 못 먹은 채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동안 이상했던 그림의 퍼즐이 맞춰진다.
우리 집 저녁 식사 시간은 늦어도 6시 30분이다. 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밥을 너무 적게 먹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학교 다녀와서 배가 고파 먹었다고 한다. 한창 클 나이라서 그럴 수 있다 했는데 너무 자주 반복되니 저녁 시간까지 참아보라고 했다. "한 그릇씩 다 먹으니 배가 하나도 안 고프지. 저녁에 새로 만든 음식 먹게 간식 먹고 기다려." "오늘 급식이 맛이 없어? 오늘 급식 뭐였어?"라고 물으면 "기억이 안 나요."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기도 했다.
체험학습장에서 빠져나와 뽀리와 초밥을 함께 먹고, 새 운동화를 사고, 매직파마를 하러 미용실에 갔다. 그날 밤 온 가족이 모여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얘기를 나눴다. 사실 어젯밤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아팠을 뽀리를 생각하니 가슴이 부서질 듯 먹먹하여 숨 쉬는 것도 아이에게 미안했다. 무리의 리더에게 한 작은 실수로 인해 어제까지 함께 웃고, 떠들고, 놀고, 밥 먹던 아이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무리의 가장 강한 아이에게 약한 뽀리는 자신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뽀리는 갑자기 투명인간이 되어 버렸다. 투명인간. 있는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담임선생님과 상의하여 위클래스에서 왕따 주도학생에게 사과를 받았다. 상대 아이도 뽀리가 한 말실수가 결코 절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을 만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주도 학생이 좋아했던 남학생과 뽀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이라 스스럼없이 지냈던 것이 별일 없을 상황으로 끝날 일이 큰일이 되어버렸다. 사과를 받았지만 뽀리는 그 아이가 여전히 두려웠기에 그 무리에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밥 먹기 위해서 다른 무리의 아이들과 밥을 함께 먹기로 했다. 한 무리의 왕따는 그 반에 어울리는 친구로써는 언터처블이 되나 보다. 1학년을 끝낼 때까지 뽀리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5분 만에 밥을 다 먹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굶지 않게 같이 밥을 먹어준 아이들에게 한 없는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2학기가 되었다. 키 153cm의 왜소한 아이. 5월부터 말 한마디 안 하고 조용히 있는 아이. 뽀리 기준 2명의 노는 아이들에게 표적이 되었다. 지우개, 볼펜을 빌리고는 망가뜨려 놓고 오히려 뭐라 하기, 말 안 하고 학용품 가져가기, 학용품에 낙서하기, 뒤에서 욕하기 등 크게 티 나지 않게 뽀리를 괴롭혔다. 공부와 운동을 잘하면 잘한다고 비꼬았다. 이런 괴롭힘 속에서 아이는 더욱 여자 아이들을 어려워했다.
병가 중이신 담임선생님 대신 기간제 선생님이 오셨다. 새로 오신 지 며칠 안 된 선생님께 너무 미안했지만 내 아이는 지금 투명인간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이 짓밟혀 있는데 괴롭힘까지 받고 있다. 가해 학생 2명은 뽀리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말도 안 걸고, 쳐다도 안 보겠다고 각각 편지를 썼다. 학교 폭력으로 신고할 수 있다고 하니 후다닥 사과하고 편지 내용처럼 이후 학교생활에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부모와 담임교사의 한 마디로 겁먹고 사과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어른이 알지 못했을 때는 약한 아이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아이들이었다. 과연 그 안에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누군가는 이 정도는 별 것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상처와 아픔과 고통의 무게는 저울에 간단히 재어지며 비교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아픔은 다 똑같다.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렇게 아이는 1학년을 끝냈다. 엄마는 여름 방학 때 필리핀 어학연수를 가서 2학기까지 지내다 2학년 올라갈 때 오자고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뽀리는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버티겠다고 했다. 그리고 1학년을 버텼고 우리는 뽀리의 '버팀'의 의지에 감사했고, 애썼다고 안아줬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으로 인해 아이는 학교에서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점점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왕따 사실을 알고 난 후 점심시간에 직장 동료들과 밥을 먹는데 밥공기에 수북이 쌓인 흰쌀밥을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나 배 고팠을까? 내 새끼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무서웠을까?' 그래서 그럴까? 난 밥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저녁밥은 잘 챙겨줘야 한다. 혹시라도 엄마에게 또 말 못 하고 굶고 있지는 않을까 괜한 걱정이 된다. 엄마가 해주는 밥 한 끼라도 든든히 먹여야 한다는 본능이 나를 이끈다.
이렇게 그 시절을 정리하고 복기를 하는데 마음 한구석이 저려온다. 눈물이 흐른다. 6년이 지났지만 엄마도 아프다. 안 보려고 했던 더 글로리를 보며 왕따와 학교폭력으로 아파했던 뽀리와 현재의 모습이 오버랩이 된다. 과연 피해를 입은 아이들에게 무엇이 최선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사과를 받더라도 피해 과정 속의 시간과 공간은 그 아이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 상처를 인정하고 극복해야 하는 것도 우리 아이들의 몫이다.
사실 아프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나도 모르고 단지 짐작할 뿐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마음은 아려온다. 더글로리 속 작가와 동은이가 복수해 주길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내 상처도 큰가 보다. 그런데 아직도 아프다고 얘기하련다. 뽀리는 중1 이후로 아직도 '친구'라는 단어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단어로 남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