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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리는 옷을 잘 입는다.

스무 살 뽀리와 엄마의 독립일기 2023.01.25

by 요피님

뽀리의 매일 일과인 산책을 오늘은 쇼핑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운동 삼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코스트코와 이케아를 연달아 다녀오기로 했다. 평상시 같으면 아무 생각 없이 검정 트레이닝 바지에 흰색 상의를 입었을 텐데 오늘은 며칠 전에 사 온 빨간색 폴라티를 꺼내 입고 바지와 점퍼를 맞추고 있다. 뽀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다니, 지극히 평범할 수 있는 행동이 나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뽀리는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동안 중1 초반과 매 학년 첫날을 제외하고는 학교 체육복과 생활복으로만 살았다. 불편한 교복 대신 체육복과 생활복을 입도록 허용한 학교에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 듯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복 트레이닝복을 입는 아이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한창 사춘기에 멋 부릴 때라서 어른 흉내 낸 옷부터 해서 고가의 트레이닝복, 패딩까지 주위에 옷 때문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는 집들도 꽤 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옷 갈등이 없다. 오히려 사준다고 해도 세상 귀찮다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가끔씩 온라인으로 옷을 보다가 괜찮냐고 물어보면 사달라고 한다. 하지만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같은 트레이닝복을 입는다. 화장끼 하나 없는 우울한 얼굴을 보다가 틴트를 사준다고 해도 '아직은'이란 말로 미루어 버리곤 했다. 평범한 고3의 최대 행사 졸업앨범 촬영 때도 아침에 대충 입고 나갔다. 아이들에게 졸업앨범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기에 그 즐거움에 함께 하지 못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하하호호 웃음과 사진 찍기에 바쁜 아이들을 보며 뽀리는 더 슬펐으리라 짐작한다. 졸업식 날에도 체육복을 입고 갈까 물어보길래 졸업식날 만은 입지 말자고 당부하기도 했다.


드디어 12월 졸업 그리고 1월 뽀리에게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다. 평상시 같으면 귀찮다고 할 아이였지만 갑자기 눈이 반짝인다. 텅 빈 옷장을 둔 뽀리는 기본티부터 시작해서 바지, 점퍼까지 이리저리 대보고 입어보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골랐다. 그리곤 옷장에 있는 몇 안 되는 옷과 새로 들여온 옷을 맞춰보며 입는데 기절할 뻔했다. 옷을 정말 잘 입는다. 톤온톤, 배색 코디 등 믹스매치를 통해 한 가지 아이템을 다양한 느낌으로 뽑아냈다. 작은 얼굴, 작은 키를 돋보일 수 있게 옷을 입는데 20년 넘게 출근한 엄마보다 훨씬 감각 있고 세련됐다.


"야, 너 진짜 옷 잘 입는다. 감각이 좋다"

"엄마, 제가 잘 입는다고 했죠! 귀찮아서 안 했을 뿐이에요." 본인도 거울 속의 자신이 맘에 드는 듯 웃으면서 말한다.


한 번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학교라는 교육제도, 제한된 공간인 교실, 학급아이들에게서 벗어난 뽀리는 무기력 속에 감추어 놓은 자신을 하나씩 꺼내고 있는 것 같다. 한꺼번에 강력한 에너지 속에서 꺼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발 나아갔다가 잠시 멈추거나 뒤로 조금 물러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뽀리는 과거의 온전한 자신과 현재, 미래의 자신을 맞이하고 준비하리라 믿는다.


뽀리가 말한다. "엄마, 저 아르바이트해서 몽땅 옷만 사면 어떻게 하죠?" ㅎㅎㅎ 그것도 다 한때이다.

"엄마는 용돈 받아서 다 술만 마셨어. 너는 스스로 돈 벌기라하지! 옷 사는 게 술 마시는 것보다 더 나은 것 같다." 한 가지 슬픈 것은 뽀리가 아무리 옷을 많이 사도 결코 그 옷은 내가 입을 수 없다. 빅사이즈가 아니면 팔다리가 끼어서 안 들어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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