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영화보다 정치영화, 그리고 정치적이기보다 장르적인 영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3월 들어 본 영화들 중 가장 만족도가 높았던 작품은 <콘클라베>입니다. 아마 보신 분들은 다 동의하시겠지만 기본적으로 아주 재미있는 스릴러이고, 종교영화라기보다 종교를 소재로 한 정치영화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소재에 대한 영리한 접근도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기술적으로도 탁월해서, 관리자를 주인공 삼아 정치싸움의 안팎을 오가는 각본이나 한정된 시공간에서 한 인물에게만 밀착하면서도 리듬과 서스펜스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편집, 과하지 않고 안정적이면서도 악센트가 정확한 연기 등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까지 보고 나면 볼커 베텔만이라는 이름이 뇌리에 확실히 남게 되는데, 에드바르트 베르거의 전작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무거운 전자음악으로 웅장함과 비정함을 더했던 그는 <콘클라베>에서도 현악기로 만들어낸 메인 선율을 영화 내내 반복함으로써 하나로 덩어리 진 느낌을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어쩌면 에드바르트 베르거는 소품을 잘 활용하고 인서트 쇼트를 최대한의 활력으로 삽입할 줄 아는 감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물 없이 군복만을 이용해 탁월한 오프닝을 선보였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떠올려보죠. <콘클라베>에서 한 가지 눈에 들어왔던 연출 또는 편집법은 인서트와 몽타주였는데, 이 영화는 상당히 많은 경우 장면을 연결할 때 주인공과 별개인 이미지들을 삽입함으로써 토마스의 눈만 따라갔을 때는 포착하기 어려웠을 시스티나 성당의 느낌을 확장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합니다. 이런 연출에는 일단 인물에게만 갇혀 있는 스타일에서 관객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이 있겠죠. 또한 이 영화가 인물의 서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집단의 서사이기도 하므로 이곳의 공기가 어떤지를 스케치하는 것도 무척 중요했을 것입니다. 이런 기능적 측면을 떠나서, 이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그 존재는 익히 알고 있지만 내부의 디테일은 몰랐던 교황청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데 있습니다. 원작자인 로버트 해리스부터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까지 고증에 몹시 공을 들였다고 하니까요. 저는 콘클라베 전날 추기경들이 모이는 순간의 긴 몽타주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코드를 뽑아 밖에 내다놓은 전화기들, 담배를 피우거나 휴대폰을 보고 있는 추기경들, 몸을 수색하고 휴대폰을 수거해 비닐백에 담는 모습, 그리고 바닥에 치쌓여 있는 꽁초들의 클로즈업. 일상적이고 인간적이면서도 스테레오타입을 비껴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이미지들이죠.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는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수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평가를 일정 부분 낮추게 되기는 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미학적으로 잘 쌓아서 전달하기는 하지만 그 메시지가 이 난장과도 같은 120분을 흘려보낸 뒤의 귀결로서는 너무 보편적이고 당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또 분명 인상적으로 사용되었음에도 상징들이 노골적인 감이 있어 보여요. 그래서 영화가 잘 쌓아 올려진 것에 비해 뒷맛이 의외로 허탈하기도 합니다. 비슷한 결핍감을 저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느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뒤에서 더 자세히 논해야 할 이 영화의 태도는, 영화 안에서 내고 있는 목소리와 모순되는 듯 보입니다.
이 영화는 결국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는 것', 그리고 폐쇄적인 시각에 갇혀 있지 않은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품입니다. 전자가 이야기의 핵심이라면 후자는 이미지의 핵심이겠죠. 콘클라베 전날 저녁 방에 있는 창문 위로 까만 덮개가 내려오고, 추기경들은 고립됩니다. 이 장면은 철창 너머에서 토마스의 뒷모습을 잡은 쇼트로 마무리되는데, 이 감금의 이미지는 신앙의 위기와 직무에 대한 부담감으로 괴로워하는 토마스의 내면을 외적인 상황과 효율적으로 결부시킵니다. 그리고 콘클라베 전날의 마지막 장면은 토마스가 '열리지 않는' 세면백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뜯다가 결국 터뜨리고 마는 상황이고요. 당연히도 콘클라베가 끝난 후 덮개는 다시 스르르 올라가고, 토마스가 커튼까지 걷어버린 후 창문 바깥을 바라보는 이미지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게다가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건물에서 '나온' 세 수녀들이 프레임을 벗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토마스의 시점 쇼트인데, 영화 내내 서사의 주변부에 머물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여성'들이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프레임을 벗어나는 느낌은 관객이 영화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듭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영화에서 가장 폭발력 있는 순간은 진짜 폭발이 일어나는 장면이겠죠. 이 폭발로 인해 성당의 지붕이 일부 파괴되는데, 역설적으로 이 테러로 인해 폐쇄되어 있던 성당 안으로 빛이 들이닥칠 수 있게 됩니다. 일단 이 순간부터 빛줄기가 연기 너머 내리꽂히는 것이 슬로모션으로 제시되고, 이후 마지막 투표 장면에서도 복구되지 못한 두 창문으로 두 줄기 빛이 실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빛보다 더 인상적인 파도소리가 이 열린 틈을 통해 들어옵니다. 멀리서, 그리 분명하지도 않게 파도소리가 들려오자 추기경들은 투표를 시작하기 전 잠깐 다 같이 그 소리를 음미하죠. 이 개방의 이미지들은 이후 영화가 나아가(자고 외치)는 방향의 밑바탕을 이룹니다.
이때 영화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는 모티브는 전쟁과 테러입니다. 초반에 일종의 배경처럼 처리되고 지나갔던 테러는 후반부에 이르러 성당에까지 미치면서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칩니다. 아데예미와 트랑블레가 하나하나 떨어져나간 상황에서 이 테러가 벌어졌기 때문에 테데스코는 자신의 보수적인 목소리를 마음껏 높일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초래한 자유주의자들을 힐난하고 '우리는 이슬람교도들을 받아들였으나 그들은 우리 땅에서 우리를 배척한다'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전쟁이 닥쳤음을 이해하는 지도자'라고까지 발언합니다. 즉, 그는 전쟁에 맞서 전쟁을 비호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몸소 전쟁을 겪어온 베니테스는 종교전쟁을 운운하는 테데스코에게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섭니다. 그는 콩고와 바그다드, 그리고 카불에서 사역을 하며 보아왔던 참상을 설명한 뒤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우리의 상대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라틴어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강경한 보수주의자인 테데스코와 달리 베니테스는 교회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 순간 영화에서는 전쟁을 옹호하며 과거로 향하는 시각과 전쟁에 반대하고 스스로 성찰할 것을 촉구하며 미래로 향하는 시각이 대립하는 셈이며, 영화가 극단적 폭력의 원인으로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는 자명합니다.
이 장면은 마치 암담한 상황을 날씨로 표현하려는 듯 비가 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베니테스의 연설이 끝난 직후의 쇼트는 108명의 추기경들이 단체로 하얀 우산을 쓰고 투표를 하러 성당으로 향하는 모습을 직부감의 슬로모션을 통해 인상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추기경들의 빨간 옷, 그리고 종종 후경에서 의상과 중복되기까지 했던 빨간 내벽은 후반부에서 전쟁과 결부되며 피를 연상시킵니다. 그렇다면 하얀 우산이 빨간 옷을 덮고 있는 이미지는 마치 비로 피를 씻어내는 것처럼도 느껴지고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수녀들이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도 다시 지적해야겠죠.
하지만 폭발과 관련해서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타이밍입니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토마스는 이전까지 변함없이 알도 벨리니의 이름을 적어왔던 것과 달리 스스로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적습니다. 특히나 트랑블레의 죄를 들춰낼 때 보여준 모습으로 인해 토마스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난 상황이고, 알도는 이제 그만이 테데스코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테데스코에 대해 계속 우려해왔던 토마스는 이 순간 자신의 영향력이 향하는 방향에 몸을 실어야겠다고 결심한 듯합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적은 용지를 투표함에 넣으려는 찰나 폭발이 일어납니다.
외적으로 너무 거대한 사건이 벌어져서 주의가 흐트러지지만 사실 이 순간은 캐릭터의 내면에서 일어난 일이 플롯의 위기를 형성하는 지점입니다. 토마스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영화는 주변 인물들을 통해 계속 관객이 토마스를, 토마스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지만 저는 그의 권력욕에 불이 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달리 말하면 이 작법은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기 위한 것일 텐데, 저로서는 이게 극적으로 잘 활용되지 못한 듯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자기 이름을 적어낸 것이 위기인가? 저는 그게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 자기 확신은 토마스 자신이 연설했던 '확신은 포용과 통합의 적'이라는 말과 충돌하며, 베니테스에게 자신의 소명은 교황직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고 했던 말에 위배됩니다. 외적인 상황이 자신을 등 떠민다고 해서 이 임무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정치 게임에 탑승하겠다고 수락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콘클라베 이전부터 신앙에 위기를 겪고 있던 그는 권력 싸움에 참여할 마음은 없지만 계속 이 상황을 주재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목격하는 것은 성직과 관계없는 알력다툼, 그리고 자리에 눈이 먼 추기경들이 벌인 추행들이죠. 그렇다면 3일 동안 그의 믿음은 점점 뒷걸음질 치고 있었을 테고, 아마 토마스 자신도 그 붕괴 직전의 신앙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퇴행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겁니다(알도는 테데스코를 두고 '지난 60년 간의 진보를 되돌릴'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내적인 타락의 순간을 테러와 겹쳐서 중요한 의미망을 형성하고, 서사적으로는 전개의 물길을 바꾸는 것이 저에게는 무척 탁월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같은 자기 확신을 이전에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설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데예미가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그날 아침 자신에게 성령이 임했고 이것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트랑블레의 보고서를 보여달라고 아녜스를 설득하며 했던 말입니다. 토마스는 왜 전 교황이 사임하려던 자신을 말렸는지 이제 알겠다며,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콘클라베를 자신이 관리하기를 바랐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녜스는 차가운 표정을 짓고는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푼 뒤 방을 나가버리죠. 아데예미가 했던 말과 이 순간 토마스가 하는 말은 상당히 유사해 보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토마스의 모습 또한 이 두 순간과 달라 보이지 않고요.
토마스와 다른 추기경들은 베니테스라는 더 나은 대안을 발견함으로써 차악에 머물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정치영화로서 이 작품은 이 지점에서 판타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교황직에 전혀 욕심을 내비치지 않았던 베니테스가 그 자리를 수락한 것은 결국 권력에 다가가는 것일까요? 영화는 그런 부정적인 뉘앙스를 깔아두지는 않은 듯합니다. 아마도 그는 모두가 자신이 설파한 바에 뜻을 같이 하기에 자신에게 표를 던졌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선출된 대상이 누군지 알리지 않은 채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토마스가 다가가 "받아들이시겠습니까?"라고 두 번 물은 끝에 베니테스는 교황직을 수락하는데, 이 짧은 간격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말하자면 토마스는 파벌 싸움에 참여하기를 받아들인 것이고, 베니테스는 (그 자신이 종결시켰다고도 볼 수 있는) 싸움이 다 끝난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받아들인 것이겠죠.
<콘클라베>는 토마스가 다시 일말의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희망은 베니테스를 통해 찾아오고, 저에게 베니테스는 죽은 교황의 영향력을 내포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베니테스와 관련된 반전과 토마스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부분을 잠깐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이 영화에서 교황은 토마스의 꿈 장면에 살짝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표면적으로는 그의 존재감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듯 느껴지는데, 사실 교황의 영향력은 이 텍스트 전체를 휘감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구조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교황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을 토마스가 하나씩 알아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알도는 교황과 체스를 두었던 일을 회고하면서 그가 언제나 자신보다 여덟 수는 앞섰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를 철저하게 대비한 인물입니다. 적대자들이 사임을 요구하는 빌미로 삼을까 봐 심장 문제를 비밀로 하고, 후보가 될 추기경들을 미리 뒷조사하고 있었으며, 베니테스의 안전과 성직을 위해 그의 존재를 아예 베일로 둘러두었습니다. 토마스와 관객이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퍼즐 조각들을 맞춰볼 수 있는 것과 달리 교황은 텍스트 바깥에서 이미 큰 그림을 완성해놓았죠.
교황이 암수를 쓴 것을 영화는 긍정적인 의미로 포장해둔 듯 보입니다. 그가 추기경들의 뒤를 캔 것은 자신의 뒤를 이을 자들이 교황의 자격에 부합하는지를 알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죽기 직전 트랑블레를 파면하기까지 했으며 트랑블레는 정말 악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첫 장면에서 토마스가 교황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나 알도가 교황을 애틋하게 추억하는 것, 그리고 악역에 해당하는 테데스코가 교황과 항상 대립했으며 그가 재위 중에 결정한 일들을 되돌리려 한다는 사실 등은 영화가 교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교황이 마지막 순간 교회에 대한 신념을 잃었다는 사실 또한 토마스와 그를 연결시키는 작법이고요.
그리고 토마스가 베니테스의 비밀을 눈감아주기로 결정하는 데에는 교황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토마스는 자유주의적 신념에 따라 베니테스의 신체적 특성이 결격 사유가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는 그 신념대로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관리자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전까지 추기경들에게 결격 사유가 발견될 때마다 결코 그 비위들을 눈감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워하는 토마스에게 베니테스는 교황이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함구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토마스는 교황이 정말 알았는지, 그런데도 계속 성직자로 일하라고 말했는지 되묻죠. 이 장면은 토마스의 미묘한 표정으로 끝나는데, 이어서 그가 교황의 거북을 발견하고 다시 연못에 넣어주는 장면이 들어간 것은 그 사이에서 생략된 그의 결정과 그 토대를 관객이 유추할 수 있게 만듭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와 일적으로 주어진 의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토마스는 교황의 선택에 의거해 결정을 내리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교황은 이 영화가 옹호하는 가치를 텍스트 바깥에서 선취한 일종의 추상적 존재이고, 이 영화는 전보다 더 나은 선을 이룩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황이 지켜냈던 것들이 퇴행하지 않도록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토마스가 발견한 일말의 희망은 새로 발명해낸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에게서 비밀스럽게 이어져 온 것이겠고요. 그렇게 본다면 토마스는 오히려 교황이 되지 않음으로써 교황과 가장 가까워진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토마스는 마지막 선택을 통해 복합적인 캐릭터로 변모합니다. 앞에서 저는 토마스가 신앙의 위기와 콘클라베의 주재 사이에 끼어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 캐릭터의 더 중요한 측면은 중립적이어야 할 직업윤리와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신념 사이의 갈등에 있는 듯 보입니다(신앙의 위기는 처음부터 제시되고 있지만 극적으로 크게 기능하는 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속에서는 편이 명백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만 중재자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명시적을 티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분열을 겪고 있었을지도요. 그렇다면 베니테스의 비밀을 모른 체하기로 한 선택은 이전까지의 중립적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한쪽 편을 들기로 한 것입니다. 토마스는 그것이 종교적으로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더 나은 일이라고 믿고 있고, 교황의 지지를 통해 확신을 얻었습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이 인물의 공과에 대해 더 폭넓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그건 영화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화가 딱히 토마스를 비판하거나 도덕적 회색지대에 놓아둔 채 끝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영화 스스로 그의 선택과 그 바탕에 깔린 가치관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이 영화의 결말에서 정말 문제적인 것은 인물의 선택이 아니라 영화의 선택입니다. 저에게 <콘클라베>는 자신이 지지할 가치를 이미 확고하게 정해둔 채 안을 채워넣은 영화로 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낡은 생각이건, 베니테스의 신체적 특성은 가톨릭의 엄밀한 규범에 따르면 논쟁의 영역에 던져질 주제일 것입니다(가톨릭 교리 및 교황의 자격 요건과 관련해서 제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점을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화는 이 부분을 아예 논쟁의 영역 바깥에서 다루고 있고, 실제로 이런 문제가 있다면 바티칸은 이런 결정을 해야 한다고 자기 뜻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듯 느껴집니다. 이 영화의 현재 엔딩은 선택의 결과가 옳다면 그 과정도 옳다, 또는 그 과정은 눈감을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죠. 이것은 '여성은 교황이 될 수 없다'는 지엽적인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케케묵은 관습을 폭력과 연관 짓고 자기반성과 다원성을 당연시하며 나아가는 이 영화의 전개 방향은 점점 폐쇄되고 극단적으로 치닫는 현시대의 정치 전반을 향해 있습니다.
영화가 테데스코를 다루는 방법을 보면 이 문제가 더욱 뚜렷해집니다. 이 영화에서 '나쁜 추기경'의 끝판왕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는 권력에 미쳐 온갖 비위를 저지르고 파면까지 당했던 트랑블레가 아니라 과격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닫힌 시각을 가진 테데스코입니다. 그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알도에 의해 교황직에 올라서는 안 될 일순위의 인물로 지목되고, 자신에 대한 험담이 맞다고 관객에게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가방을 들어주려는 수행원의 손을 단호하게 내리치죠. 테데스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식사 장면도 그가 "지옥은 또 다른 지옥을 부릅니다."라고 말하자 토마스가 자기 옷깃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베니테스가 선출되는 순간 그는 그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박수를 거부한 채 앉아 있습니다. <콘클라베>는 낡고 경직된 가치관을 경계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반대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인물을 평면적이고 악하게 만든 뒤 마음껏 공격하고 그 반대편을 드높이는 건 시나리오적으로도 편하고 안일한 방법입니다. 게다가 세상에 만연한 테데스코와 같은 사람들을 깊고 입체적으로 탐구할 기회 자체를 스스로 걷어찬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가치관에 대해 딴지를 걸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무리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 해도 포용과 다양성에 대해서까지 그래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죠. 지나치게 보편적이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는 많은 경우 허탈하기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텍스트 바깥에서 부여된 이 시각이 영화 안에서 캐릭터의 드라마를 통해 펼쳐진 이야기와 모순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영화는 추기경들에게 회의하고 의심할 것을, 확신하지 말 것을 설파하지만 스스로 그 조언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콘클라베>에서 느낀 재미의 대부분은 장르적인 데서 왔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영화가 얼마나 잘 쌓아올려졌는지를 살펴보는 것보다 왜 위태위태한지를 파고드는 재미가 더 크기도 했고요. 이 영화는 언뜻 근엄하고 숭고한 목소리를 내는 듯 보이지만 사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이상한 방식으로 하고 있기에 저는 메시지에 한정하자면 <콘클라베>의 가치는 거의 없다고까지 보는 쪽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메시지가 뛰어난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를 더 좋아하고, 단점을 다각도로 뜯어보는 데서 느끼는 재미 또한 장르적인 재미 못지않게 즐기는 편이기에 <콘클라베>가 높은 만족도를 준 작품이라는 평가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국내 흥행세도 아마 순수한 재미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