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크림수프
"언니 언니! 이거 먹어본 적 있어?" 집에 들어온 동생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신기한 물건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을 떨며 말을 했다. "뭔데?" 동생이 포장해서 들고 온 봉투를 보니 집 앞 빵집에서 파는 듯한 음식이었다. "이거 토마토 크림 수프라고 하는데 진짜 진짜 맛있어."
"너 친구 만나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만났지! 집 앞 빵집에서 만나서 같이 점심 먹을 때 이거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언니 줄려고 또 사 온 거야 먹어봐 봐"
동생의 입맛은 짧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데, 하루에 두 끼 이상 같은 반찬으로 먹는 것을 싫어하고, 점심에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저녁에는 이미 질려있기 일쑤였다. 그런 동생이 유난을 떨며 먹을 것을 사 들고 들어오는 일은 흔치 않았기에 '대체 어떤 맛이길래 저러지?'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포장지를 열고 수프 용기 뚜껑을 열어보니 살짝은 시큼한 향이 나는 연한 주황 빛깔의 수프가 보였다. 얼핏 보기엔 마치 로제(Rose) 파스타 소스를 따뜻하게 데워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굳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숟가락까지 직접 챙겨주며 먹어보라는 동생의 성화에 못 이겨 한 입 먹어보았다.
"......"
뭐랄까- 첫맛은 시큼했지만 혀 끝에 구수한 맛과 고소한 맛이 남았고, 간은 짜지도 달지도 않은 것이 어딘지 모르게 살짝 밍밍한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오묘한 맛이었지만,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는 그저 영락없는 묽은 파스타 소스 맛이었다.
"어때? 맛있지 않아?" 동생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며 묻는데, 아니라고 단칼에 잘라서 대답하기가 어쩐지 좀 미안해졌다.
"음... 뭔가 좀 미묘한 맛이야."
"한 번 더 먹어봐 절대 후회 안 한다니까"
"아니 진짜 괜찮은데......"
내가 크게 내켜하지 않자 이번엔 동생이 직접 한술 떠서 입에 넣어주었다.
"이게 처음엔 좀 미묘한 거 같은데 먹다 보면 맛이 아주 괜찮아 중독적인 맛이라니까"
확실히 수프는 맛이 아예 없지 않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내 취향에 가까운 쪽도 아니었다.
"확실히 네가 좋아할 만한 맛이긴 하네"
"그렇지 그렇지? 더 먹어 언니”
"아까 점심좀 많이 먹어서 아직 배가 부른거 같어 어차피 집앞에서 파는 거니까 나중에 사 먹지 뭐”
"그래? 그럼 나머지는 내가 다 먹는다"
"응"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부엌으로 들어왔다. 사실 매우 출출한 터라 주전부리를 찾으러 부엌으로 가던 중에 집에 들어오는 동생이랑 마주친 건데, 사실대로 말하자니 자기가 사 온 거 더 먹어보라며 성화를 부릴게 불 보듯 뻔한 일이라, 동생이 씻고 있는 틈을 타 선반 위에 있는 식빵과 치즈를 꺼내어 입안에 욱여넣고는 조용하게 부엌을 나왔다.
지금은 엄마가 된 동생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조카를 데리고 집에 쉬러 왔다. 집에 오자마자 조카는 엄마에게 맡겨 둔 채 전기장판을 깔아 둔 내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등을 지지면서 아기 돌보는 얘기, 남편 얘기, 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하더니만 문득 예전 생각이 났나 보다.
"옛날에 말이야 둘이 같이 살 때 이거보다 더 작은 침대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모르겠어"
"그러게 말이야, 근데 그 좁아터진 침대에 맨날 둘이 누워서 티브이만 보지 않았었냐?"
"맞아 맞아 그땐 침대 위에서 게임하고 밥 먹고 티브이 보고 그랬었는데... 와... 시간 진짜 빠르다"
그렇게 한동안 누워서는 점심을 뭘 먹어야 하나 고민을 하다 결국 둘 다 배달 앱으로 음식들을 보기 시작했다. 돈가스는 어제 드셔서 싫네, 점심부터 웬 보쌈이냐, 햄버거는 엄마가 안 드시네 이러면서 나름대로의 진지한 점심메뉴 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피자집 메뉴 중에 토마토 파스타가 보이자 문득 예전 그 수프가 떠올랐다.
"맞다! 너 혹시 그 토마토 크림수프는 기억하냐?"
"토마토 크림수프가 뭐야?"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역시나 였다. "헐...... 애 낳고 나더니만..."
"아니 내가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래"
"그 왜 네가 막 집에 사들고 와서는 맛있다고 호들갑 떨던 거 말이야"
동생은 연신 갸우뚱하더니 한참 뒤에야 "아! 기억나! 그건 정말 센세이션 했었지. 맨날 토마토소스만 먹다가 크림 들어간 로제는 진짜 맛있었어"
분명히 동생이 말하는 로제는 파스타 소스 같은데 얘가 뭘 얘기하나 싶어서 다시 물어봤다.
"로제는 파스타 소스 아니야?"
"그거 아니었어?"
"아니 뭐 굳이 맛으로 따지자면 비슷하긴 한데, 로제는 소스고 내가 말했던 건 토마토 크림수프고"
"솔직히 기억이 잘 안나 근데 그 빵집은 기억이 나지. 그 왜 바로 집 앞이어서 우리 집 물 단수됐을 때, 언니랑 나랑 빵집 화장실 간다고 미친 듯이 뛰었잖아"
"아...... 맞아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진짜 급했다고" 그러고는 둘이서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었다.
"화장실은 기억하면서 왜 수프는 기억을 못 하냐?"
"언니도 나중에 애 낳아봐 다 이래. 아니 뭐 또 언니가 수프 만들어주면 기억이 날 수도 있고"
아차...... 싶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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