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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아 Oct 22. 2021

적 양파 잼 ( Red onion jam)

잼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학교 졸업 후에 곧 오픈하는 미국식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가 생겼었다. 입학하기 전부터 일해보고 싶었던 파인 다이닝 스타일의 레스토랑이 아니었지만, 오픈 매장에서 일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그냥 보내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모험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본격적으로 레스토랑 오픈을 하기 전에 같이 일하게 될 모든 스태프들이 한 자리에 모여야 할 일이 두 번 있었다. 첫 미팅 시간에는 가게에 대한 소개로, 운영 방침과 오너의 철학 그리고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스텝들과의 안면을 트는 겸 직원 개개인의 일 스케줄을 조정하는 시간이었고, 두 번째 모임 시간에는 앞으로 가게에서 만들어서 판매해야 할 메뉴들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었다.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이제 막 안면을 트기 시작한 서른 명 남짓한 사람들과 처음 보는 메뉴들로 자유로운 토론을 하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무슨 사전 미팅을 두 번씩이나 해야 하나... 내가 경영진도 아닌데' 라며 속으로 조용히 투덜투덜거리고 있었다.

두 번째 미팅 날은 첫 미팅 장소와 동일한 장소였던 사무실에 모여 다들 어딘지 모를 어색한 분위기들을 잔뜩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십여분이 지나서였나, 첫 미팅 때 봤던 운영진 중 한 명이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이번 미팅 장소를 다이닝 홀(hall)로 변경하려고 하니 자리를 이동해 달라며 부탁했다. 무슨 일로 장소를 바꾸나 싶었는데, 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국식 다이닝 레스토랑답게 준비된 음식들은 소고기, 칠면조, 생 참치, 비건재들로 만든 다양한 버거들이 메인으로 있었고 그 외에 버거들과 같이 곁들이면 사이드 메뉴들과 샌드위치, 샐러드, 그리고 디저트와 음료들까지 종류별로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앞으로 만들어내야 할 메뉴들을 시식해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라는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던 불평들이 순식간에 눈 독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참 단순하구나 싶었다.)

아직은 친해지지 않은 사람들과 밥을 먹는 게 분명 불편할 법도 싶은데, 그때의 나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한쪽 구석 테이블에 준비되었던 빈 접시에 준비되어 있는 음식들을 차곡차곡 담기 바빴었다. 마지막 디저트와 음료까지 빠짐없이 챙겨 와서는 곧바로 자리에 돌아와 먹어보기 시작했다. '앞으로 이 가게에서 만들 음식들이 이런 맛이구나...' '얘는 내 내 입맛에는 별로네...' 등 혼자 생각하면서 나 홀로 품평회 겸 식사를 하고 있던 중에 '어? 그런데 이건 무슨 맛이지?' 싶었던 것이 있었다. 분명 소고기 패티로 만든 버거를 집었기에 큰 기대 없이 한 입 베어서 우물거리고 있었는데, 입 안에서 새콤하면서도 달짝지근하고 또 묘하게 고급스러운 향이 감돌았었다. 궁금한 마음에 햄버거 번을 들어 토핑들을 살펴보는데 패티 위에 진한 자주색의 무언가가 얹어져 있었다. 이게 대체 뭘까? 싶은 생각에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거 양파잼이에요"라고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음식을 집어올 때 내 옆자리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은 이 주방의 수 셰프(sous chef)였었고 앞으로 일하게 될 스태프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하면서 음식에 대한 평을 듣고 있었다고 했다.

"버거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맛이 나서 굉장히 인상 깊네요"라고 얘기하자 "양파잼이 그 버거의 포인트랍니다"라고 말하며 그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레스토랑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을 당시 내가 주로 했었던 일들은 밑준비 소위 프렙(prep)들이었다. 예를 들면 각종 버거에 쓰이는 패티들 작업, 사이드 메뉴들 작업, 각종 햄과 치즈들 소분, 생 고기들은 부위별로 손질해서 정리하기 샐러드드레싱들과 버거 소스 만들기 등 그때 그때 필요한 잡다한 일거리들이 대부분 이었었다. 누군가는 허드렛일을 한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 나는 프렙을 통해서 갖가지 잔 기술들과 기초 지식들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방이 전체적으로 어떤 흐름으로 돌아가는지 폭넓게 볼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점은, 레스토랑에서 쓰는 고급 재료들을 소분하고 정리해서 남은 자투리들을 조금씩 맛보고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점이 제일 좋았다. 


    그날도 출근하자마자 어김없이 오늘의 일거리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개인수첩에 적고 있었는데 수 셰프가 다가왔다. 오늘은 양파잼을 만들어야 한다며 내게 레시피를 불쑥 건넸다. 안 그래도 양파잼 레시피가 궁금하긴 했었는데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내심 기쁜 표정을 짓자, 내게 눈물 흘릴 준비가 돼 있냐고 묻더니만 싱긋 미소를 지었다. 뜬금없이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하네 싶었는데, 막상 내가 썰어서 준비해야 할 양파 양을 마주하니 그제야 그냥 농담으로 건넨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족히 30~40킬로 정도 되는 양파를 까고 가늘게 채를 썰어서 준비를 해야 하니 말이다.

양파잼을 만드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나름의 소소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작업을 시작할 때 양파의 매운 내에 정신없이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나와 개수대를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며 씻어 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양파를 썰며 풍겨대는 매운 냄새 때문에 주변에서 사람들이 같이 작업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양파 잼 만드는 작업이 어느 정도 손에 익었을 즈음에는 그날 일정에 양파잼 만드는 일이 있으면 급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는 한 매번 마지막 순서에 배정해서 작업을 했었다. 잘 볶아진 양파에 식초를 넣어서 졸이는 과정에서 올라오는 식초 냄새가 머리카락이며 옷이며 앞치마며 할 거 없이 배이기 때문에, 일하는 내내 온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도무지 빠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양파 잼에는 와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주방이 미친 듯이 바쁘게 돌아가지 않을 때에는 와인 가지러 가는 것을 핑계 삼아 홀에 있는 바(bar)에 가서 조금씩 쉬다 오곤 했었다. 바 직원들과 말을 나누면서 시원한 탄산음료를 얻어 마시는 재미도 있었고, 또 더운 열기와 긴장감이 웃도는 주방과는 사뭇 다른 홀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제법 즐거웠다. 음식을 먹거나 음료를 가볍게 한 잔씩 하며 여러 대화와 웃음소리로 가득 메워진 홀의 생동감은 묘한 에너지를 주곤 한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서 일을 마무리할 즈음이면 어느덧 퇴근 시간이 다되어간다. 알맞게 졸여져 가는 양파를 흐뭇하게 바라보다 문득 옷을 갈아입고 바깥공기를 쐬며 커피 한 잔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여유로움을 상상하면 어느새 설레기까지 한다. 또 몸은 조금 고단하게 느껴도 하루 일을 무사히 또 착실하게 끝냈다는 기분 좋은 안도감과 성취감이 아주 썩 괜찮다.





:: 적양파 잼 만들기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7HSRXeIBf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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