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하루의 소박한 위로
시카고 시내에는 프렌치 마켓 (French Market)라는 로컬 마켓(local market) 이 자리하고 있는데, 유럽풍의 시장을 본떠서 만든 곳으로 일반 마켓이나 식료품 가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식자재들을 구할 수 있었다. 또 역사 내에 위치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부터 일반 레스토랑까지 오밀조밀 입점되어있기도 하다. 나름 시카고의 핫플레이스 (hot place)인지라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학교나 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하지도 않았었고, 또 집 앞에 큰 일반 마켓이 두 곳에서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것들을 구할 수 있어서인지, 좀처럼 갈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단체로 현장 학습으로 프렌치 마켓을 가게 되는 바람에 드디어 나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시카고에서 산지 5년이 넘어가도록 한 번도 가 본 적 없다는 말에 친구들이 의아한 눈치였지만 어쩌겠는가, 게으름의 위대한 승리인 것을!
마켓은 실내에 자리하고 있었고 크기도 크지는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흥미로웠고 또 시내 한복판에서 느끼는 이국적인 느낌이 퍽 좋았다. 그 후로는 방과 후에 종종 들러서 점심을 해결하기도 하고, 특이한 식자재는 뭐가 있나 기웃거리고 또 안 먹어본 요리들이 보이면 한두 개씩 사서 집에 돌아가는 쏠쏠한 재미를 느끼곤 했다.
그날은 유난히도 무덥고 지치는 날이었다. 학기 말 프로젝트 마감일이 바로 코 앞에 닥쳤는데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습 시간이 끝나고 청소 문제로 팀원들 간에 조그마한 실랑이가 벌어져서인지 신경이 이래저래 바짝 곤두서 있었다. 다 필요 없고 그저 집에 빨리 가서 씻고 눕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져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리복과 노트와 필기구들을 가방에 대충 구겨 넣고 칼 가방을 챙겨서는 학교를 뛰쳐나오듯 급하게 나왔다.
얼마쯤 걸었을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바람을 쐬며 역을 향해 멍하니 거리를 걷다 보니 답답했던 기분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집에 가려던 발걸음을 잠시 돌려서 기분전환이나 할 겸 프렌치 마켓이나 들렀다 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입구부터 풍겨오는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 냄새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시장기가 몰려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밥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매장 입구부터 여러 음식들이 눈에 띄었지만 뭔가 든든하고 맛있는 걸 먹고 싶은 마음에 바삭한 바게트에 고기와 치즈가 듬뿍 올라간 따뜻한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빈 테이블에 혼자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가 조금 민망해서 괜히 옆 가게를 기웃기웃 둘러보게 되었다. 한국식으로 이해하자면 반찬가게 같은 곳으로, 올리브나 안초비, 버섯, 고추 등의 각종 절임류 들을 파는 곳이었다. 가격대가 조금 있기도 하고 당장 집에 가서 냉장고만 열어도 한국인의 얼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각종 젓갈류들이 가득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도 눈으로만 훑어보고 가는 곳이었다. 여느 때처럼 대충 둘러보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데, 가게 입구 쪽 가판대에 할인 스티커가 붙은 샐러드가 눈에 띄었다. '지중해식 콩 샐러드'라고 쓰인 투명한 용기 안에는 각종 콩들 (강낭콩, 병아리콩, 검정콩, 하얀 콩 등)과, 그린 올리브, 블랙 올리브, 아티초크 (artichoke)와 구운 파프리카 등이 올리브유에 버무려진 샐러드가 있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기에 대체 무슨 맛일까? 싶은 호기심에 샐러드 한 통을 구매하고는 기다렸던 샌드위치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는 집으로 곧장 돌아왔다. 냉장고에 샐러드를 모셔두고는 개운하게 씻은 후에 침대에 뛰어들어서는 단잠에 빠졌다.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주위가 어스름해질 무렵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서는 물 한 모금을 마시며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가볍게 저녁을 먹어야겠다 싶은 생각에 발을 질질 끌며 냉장고 문을 열고서는 우유와 납작 복숭아, 낮에 사 온 콩 샐러드와 부엌 선반 위에 있는 빵 봉지에서 빵 한 조각을 꺼내어 조촐하게 저녁 상을 차렸다.
"잘 먹겠습니다" 나지막하게 읊조리고서는 차가운 콩 샐러드를 한 입 넣었다. '어?' 싶은 생각에 한 입 그리고 또 한 입. 과장 같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입안에서는 마치 여름밤의 축제가 벌어지는 듯했다. 부드러운 콩과 식감이 있는 콩들 그리고 짭짤하고 고소한 올리브와 상큼한 레몬 맛과 향이 입혀진 시원한 채소들이 맛을 더 해주었다. '내가 콩을 이렇게 좋아했었나?' 싶을 정도로 예상치 못했던 맛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행복한 느낌도 가득했다. 빛의 속도로 샐러드를 한 통 다 비운 뒤에는 모자란 듯한 아쉬움에 빈 통을 이리저리 손으로 돌려가며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어스름 한 저녁 책상 위에 스탠드 조명에 하나에 의지 한 채 마주했던 단출하고 소박한 저녁 식사는 지치고 힘들기만 했던 감정을 매만져 주었고, 외롭게만 느껴졌던 하루의 빈자리를 풍성하게 채워준 느낌마저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만들기 어려운 것이 아닌지라 만들어서 먹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만들 거면 넉넉하게 만들어서 아쉬운 마음 들지 않게 먹어보자 라는 생각에 커다란 유리병을 사서는 그득히 만들어서 마치 김장 김치 담근 사람 마냥 뿌듯해하고 흐뭇해했던 기억이 있다.
:: 지중해식 콩 샐러드 만들기 유튜브 영상 ::
3가지 콩으로 만든 지중해식 콩 샐러드 :: Fresh Mediterranean bean salad with 3 b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