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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의 이너콘서트 Feb 14. 2021

어느 중년 덕후의 클라쓰

피아노에 평생을 쏟아부은 택시기사 이야기

십여 년 전 어느 여름날, 강남역에서 약속이 있었다. 그 날 따라 퇴근 무렵에 일이 몰려들어 6시가 조금 넘은 시간까지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대충 마무리하고 사무실 앞에 길게 줄 서 있는 택시로 뛰어갔다.


택시가 올림픽대로에 들어서자마자 여지없이 막히기 시작한다. 출퇴근 시간에 택시가 더 막히는 건 수 십 년 동안 변하지 않는 진리 이건만, 나는 붐비는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 정신없이 뛰는 게 싫어 '뭐 막히면 얼마나 막히겠어?' 하는 허황된 기대로 택시에 올랐고, 조만간 그 기대가 무색할 만큼 엄청난 택시비 폭탄을 맞을 예정이었다.



♤ 범상치 않은 택시기사


올림픽대로에서 길이 막히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며 택시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피아노 연주는 라디오가 아니라 CD 플레이어에서 나오는 음악이었다. 기사님이 클래식을 많이 좋아하시는 분인가 보다 생각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피아노 소나타였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곡이었다. 하지만 연주는 상당히 괜찮았다. 약속 시간에 늦어 분주한 마음으로 택시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음악 감상이나 하고 있는 게 좀 안 어울리는 상황이었지만, 들을수록 몰입이 되는 연주였다.


나는 피아노 곡은 많이 듣지 않는 편이라 기술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연주자는 저음을 묵직하게 끌고 가면서도 멜로디는 저음에 묻히지 않을 만큼 밀도 있고 선명하게 연주했다. 두 곡 정도를 가만히 듣다가 너무 궁금해서 기사 아저씨에게 물었다.


"기사님, 이거 CD죠? 연주가 상당히 개성 있네요. 누가 연주한 건가요?"


기사 아저씨는 불명확한 발음으로 외국 이름을 말했는데,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까지 정확히 들리지 않았다. 다시 물어보려고 했는데, 기사 아저씨가 다른 말씀을 덧붙이시는 바람에 물어보지 못했다.


"잘 치긴 하는데, 페달을 너무 많이 써. 그렇게 하면 멜로디가  뭉개진다고."


나는 멜로디 라인을 나름 잘 살린다고 생각하고 듣고 있었는데, 기사 아저씨의 평가는 정 반대였다. '그래? 별로라는 얘기구만. 뭐 나야 피아노는 문외한이니까.' 어쨌든 이 아저씨, 상당한 클래식 애호가인 것 같았다.


"피아노 연주를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택시 안에서 CD로 들으시는 분은 처음 봬요."

"좋아하나 마나, 이젠 웬수지."

"하하하, 너무 좋아하셔서 그런가 봐요? 저도 클래식 좋아합니다. 저는 현악기에 관심이 많아요."


아저씨는 웃음기가 없었다.



택시기사의 정체


아저씨는 피아노가 좋아서 레슨을 받고 있는데 아무리 연습을 해도 늘지 않고, 너무 어려운 악기라고 했다. 나는 피아노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첼로를 해서 조금은 이해가 된다고 공감해 주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그동안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괴로움을 들어줄 사람을 만났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 갑자기 상기되며 삼십여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는 군대를 제대하고 난 뒤 마땅히 일자리를 찾지 못해, 서울에 올라와 있는 고향 선배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며 지냈다. 선배가 출근을 하면 아저씨는 자취방에 남아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 우연히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피아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네 피아노 학원을 다니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 생활은 낯설고 일은 재미가 없었지만 다행히 피아노는 재미가 있었고 덕분에 서울 생활에도 조금씩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에 재미 삼아 가볍게 시작한 피아노는 시간이 지나도 그 흥미가 줄지 않았다. 나중에는 얼마 되지 않는 월급에서 조금씩 돈을 모아 피아노를 구입했다. 몇 년 그렇게 피아노를 배우다가 이제는 동네 학원이 아니라 입시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배우기 시작했다.



♤ 인생이 정체되다


기사 아저씨의 그런 열정에도 불구하고 생각처럼 피아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음악을 듣고 연습을 할수록 귀는 트이고 기대 수준은 점점 높아지는데, 실력은 쉽사리 기대만큼 따라와 주지 않았다. 연습 시간을 더 늘이기 위해 술도 끊고, 더 좋은 선생님을 찾아다녀도 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연애 따위는 할 시간도 없었다. 간신히 연습을 해 놓아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뻑뻑해지는 손가락 때문에, 손가락 사이를 찢는 수술을 하려는 유혹까지 받았다.


아저씨는 이십 대 중반부터 지금껏 피아노에만 매달려 아직 혼자 살고 있었다. 월급을 받으면 대부분 레슨비와 월세로 쓴다고 했다. 지금은 이대 교수님에게 레슨을 받고 있는데 일주일 동안 죽어라 연습해서 조금 손가락이 돌아가는 것 같다가도 레슨을 받고 돌아오면 금세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아저씨는 그 얘기를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시는 것 같았다.


레슨을 아무리 받아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절망감. 내가 아주 잘 아는 감정이다. 하지만, 인생을 통째로 쏟아붓고 있는 그 아저씨에게 나도 그 마음을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음악이 뭐라고...'


택시는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꿈쩍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약속 장소까지 걸어서 15분이면 갈 거리까지 왔지만 아저씨가 너무 진지하게 얘기하고 계셔서 내릴 수가 없었다. 택시도, 기사 아저씨도 그리고 승객인 나도 아저씨의 인생 어느 자락에서 추억에 잠겨 정체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도 미터기의 액정 안의 말은 무심하게 달리고 있었다. 택시비가 2만 5천 원을 넘어서는 게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클래식 덕후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 날 만난 택시 기사 아저씨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 혹은 집착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덕후에도 '클라쓰'가 있다면, 그는 덕후의 지존이었다. 흥미와 집착, 취미와 덕질.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그 스펙트럼의 폭은 넓고도 넓은 것 같다.


그리고 그날, CD에서 흘러나오던 피아노의 연주자 이름은 끝내 다시 물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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