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된 것을 꼭 봐야지 행복한 사람의 결심
프랑스 한국문화원에서 빌린 현대미술 잡지 두 권을 반납하러 갔다. 현재 6주째 반나절 동안 부업에 꼼짝없이 매달리고 있기에 잠깐 반납만 하고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서둘러 가보니 문화원 문이 닫혀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공휴일도 아닌데도 말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공휴일인 삼일절이라 휴관이었다. 그 당시 나는 그것까진 생각을 못하고 헛걸음했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꽁해졌다. 하지만 8구의 오스매니안 양식의 건물들을 보고 있으니 마치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느꼈던 설레는 마음까지 스멀스멀 생겨나는 것이었다. 사실 2020년 코로나 에포크 이후 바깥 외출은 자제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가끔 파리 다른 동네들을 가면 건물들 양식이나 여러 햇빛이 비치는 모습들이 퍽 신선해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화려한 부조장식, 발코니, 인물 석고상까지 장식되어 있는 건물들을 감상하는 것은 즐겁다. 건물 관람은 내가 그 속에 들어갈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다. 건물 관람 도중 뭔가 어떤 기분이 획하고 지나갔다. 쓸쓸함은 아니었다. '어서 돈을 벌어서 나도 화려한 건물 속에서 살아야지'라는 야망도 아니었다. 이제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들어갈 수 없는 풍경으로서 도시 관람을 이어가는 것 같아 아찔하면서도 날씨는 좋아서 애써 잊을 수 있는 마음에 가까웠다.
한국문화원이 위치한 이 곳, 8구에서는 산책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컬러 프린트로 꽉 꽉 채워져 얇아도 꽤 무게가 나가는 두 권의 잡지책을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마침 낮 최고 기온은 15-17°까지도 올라가는 시점이었으니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기도 했다.
파리는 작은 도시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루브르가 나오고 센느 강이 나온다. 여기도 마찬가지, 몇 골목만 지나니까 불과 일주일 전에 내가 가로질러갔던 명품샵들이 즐비한 거리가 나온다. 쇼윈도에 진열된 명품들은 화려한데 손님들은 하나 없는 한산한 낮 3시. 통통 튀는 무기력감이 든다. 먼지가 폭 폭 쌓인 무라카미 다카시의 해바라기 조형물 같은 마음이 든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주위 친구들 모두 명품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흥겨운 마음에 명품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괜히 ‘이것저것 유명한 거 맞지?’ 호들갑을 떨어보았다. 약간 당황한 기색의 친구 표정. ( 아마 내가 말했던 브랜드는 명품이 아니었나 보다) 그때 친구들이 들고 있던 입생 로랑, 클로에, 루이비통이 모두 모여있는 이 거리를 지나치고 있다.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 수수하다. 나는 명품백을 갖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 뭔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이곳 파리는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곳들이 많은 것 같은데 명품샵이 유난스럽게 내 눈앞에 위치해서 표적이 되었던 것일까.
계속 걸어가니 그랑팔레가 나왔다. 그랑팔레는 쁘띠팔레와 더불어 대규모 전시들을 개최하는 전시장이다. 사진전, 패션위크, 각종 박람회들이 열리는 곳이지만 굳게 닫혀있다. 작년 2020년부터 시작되어 무려 2023년에 끝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상들이 햇빛을 받아 그 그림자가 더욱 짙어져 있다. 정문의 파사드에서는 그 화려함이 절정에 달한다. 과거의 찬란한 승리를 새기며 휘몰아치는 바람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조각상들이 문 주위를 장식하고 있다. 여기가 바로 문이라는 것을 온갖 위용을 다해 뽐내고 있고 난 그 문에 들어갈 수 없다. 마찬가지 상쾌한 마음으로 그랑팔레의 문에 대한 짧은 관람을 뒤로 한 채 산책을 지속하였다.
미술사 석사생이었을 시절, 여기서 많은 전시들을 보았다. 교수님과 같은 수업 학생들끼리 전시 관람을 한 적도 있고 혼자 다녀간 적도 있다. 그때가 2016년이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후, 그랑팔레의 맞은편에서 나는 우연히 산책을 하고 있다. 그랑팔레가 다시 문을 여는 2023년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때는 마스크를 벗고 있을까? 나는 관람을 멈추고 이 프랑스 사회 어딘가 한 곳을 찾아 진입에 성공하였을까?
미술관, 박물관들에 들어가 작품들을 보고난 후 근처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들이 나에게 너무 소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꿈같은 시간들 같기도 하다. 현재 코로나로 인해 파리의 모든 미술관들은 문을 닫은 상태이지만 사립 갤러리들은 여전히 문을 열어놓고 있으니 오후에 일을 얼른 끝내고 여기저기 다녀보려고 한다. 미술관들이 문을 닫자 예전의 내가 즐겼던 순간들의 소중함이 간절해진다. 이 글을 쓰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제껏 유럽의 여러 전시들를 다녀본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면서, 또 새로운 전시들을 기다리면서 도시 관람자의 설레는 기운을 계속해서 유지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