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나나 Apr 18. 2023

06. 왕따모드 해제

나도 언니 같은 사람이 될 거야.

  어느 날, 팀 하나가 사라졌다.

팀장이 퇴사하는 바람에 그 팀원들은 각기 다른 팀으로 소속된다는 말을 듣고 괜히 긴장했다.


'우리 팀에 오면 어떡하지'


스스로 '왕따사건'이라고 정의하는 일이 고작 몇 달 전이고, 친구를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자의적으로도 타의적으로도 나는 왕따모드. 새로운 사람을 맞이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팀원 중에서도 가장 첫인상이 무서웠던 사람이 우리 팀에 왔다. 기가 세서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둥, 남자친구 없는 데 있는 척하는 거라는 둥 여러 소문이 돌고, 평균 근속연수가 1년이 채 되지 않는 회사에서 3년 가까이 근무하던 언니. 내가 가장 기겁했던 건, 대표님이나 다른 팀장님들한테도 아닌 건 아니라고 웃으면서 할 말 다 하는 모습이었다.


  우리 팀에 팀장 포함 3명은 그 언니와 이미 친분이 있었는지 반갑게 맞이했다. 그들이 모여 이야기하면 괜히 소외감이 들었다. 그들은 나이대가 비슷하고 나는 어리니까 대화 주제도 내가 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언니를 환영하는 팀 회식자리에도 갈 수 없었다. 아무리 20살이 석 달도 안 남았대도 10대와 20대가 친해지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격주로 토요일은 퇴근 후 청소를 해야 했다. 내 담당은 주로 책상을 닦는 일이었다. 그 언니의 책상을 닦고 있는데 뒤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언니가 손사래를 치며 나를 말렸다.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닦아드리겠다 했지만 극구 사양하며 자리로 돌려보냈다. 이게 나와 언니가 서로 나눈 첫 대화였다. 어리다는 이유로 편하게 반말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보다 7살이나 많으면서도 존댓말을 했다. 처음으로 회사에서 존중받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러 소문과는 달리 무해한 미소와 말투로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며칠 뒤, 점심시간에 화장을 고치러 화장실에 갔는데 언니가 열심히 얼굴에 퍼프를 두드리고 있었다. 멋쩍게 눈인사를 하고 나도 파우치를 열었다. 왠지 적막 속에서 둘이 한 거울을 보고 있자니 조금 어색했다. 얼른 하고 나가려 했는데 하필 내 메이크업에 가장 중요한 제품을 집에 두고 왔다. 난감해하는 날 보았는지 언니는 왜 그러냐 물었다. 나는 그저 "어.. 파우더.."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언니는 파우치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내 파우더인데 괜찮으면 써볼래요?"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화장실 거울에 나란히 서서 수다를 떨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한 경력이 있는 언니는 좋은 화장품들을 추천해 주고, 소소한 꿀팁들도 알려주었다. 어느 날은 앞머리도 잘라주었고, 내가 제일 어려워했던 눈썹 그리기 강의도 해주었다. 거의 매일 '굥이언니~' 하며 졸졸 쫓아다녔다. 화장실을 가도 밥을 먹어도 함께였다. 언니는 그런 내가 귀찮지도 않은지 항상 웃으며 챙겨주었다.


나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니가 나서서 한마디 해주기도 하고, 모르는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편하게 알려주기도 했다. 팀장님과 팀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크고 작은 일을 중재하는 역할도 해주었다. 든든한 나의 친구이자 선배였다. 아무도 못 건드리는 무서운 언니와 친해진 덕분인지, 내가 좀 밝아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향한 다른 팀 사람들의 눈빛이 순해졌다. 언니는 내 내면에 단단히 걸려있던 걸쇠를 단숨에 풀어 왕따모드 해제버튼을 눌러준 것이다.


  언니의 소문은 당돌한 성격에서 왜곡된 것들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쁜 것들은 질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나 또한 오고 가는 뒷말들로 그렇게나 속앓이를 했으면서 처음에 언니를 그런 편파적인 말들로 판단했다. 미안한 마음에 어느 날 언니에게 넌지시 사과의 말을 전했지만 시원하게 웃으며 자기 인상이 원래 좀 세다며 그럴 수 있다고 괜찮다고 했다.


언니를 좋아했던 건, 단순히 화장을 알려주고 나에게 잘해줘서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없는 이성적이고 당찬 모습을 동경했다. 나도 26살이 되면 저렇게 똑 부러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언니의 좋은 면들을 닮아가려 애썼다. 26살을 훌쩍 넘긴 지금에서야 언니와 나는 태생부터 성격이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언니는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맛있는 걸 사주고, 함께 여행도 다녔다. 성년의 날엔 사무실 책상에 뽀얀 레이스 속옷 선물 세트를 올려놔 퍽 난감했지만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 이벤트로 남아있다. 스무 살 생일에 언니에게 받은 머리빗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둘 다 퇴사를 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긴 적이 있지만 적어도 2~3년에 한 번은 만나 근황을 공유한다. 작년에는 웨딩사진을 직접 보정해주기도 하고, 내심 결혼하는 언니가 아쉬워서 편지를 축의와 함께 부치기도 했다. 최근엔 조카가 곧 세상에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도 했다. 워낙에 감수성이 없는 사람이라 딱히 편지나 선물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언니한테 만큼은 뭔가를 바라면서 주지 않는다.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고, 난 아직도 다 갚지 못했으니까.




  언니가 없었다면 내 첫 사회생활의 기억은 온통 잿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언니처럼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질 순 없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먼저 손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굥이 언니'가 될 수 있길. (내 이름도 '경'으로 끝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05. 대혼란의 멀티지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