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넷
올해 팔 월에 가족들을 전부 이끌고 지방의 소도시로 이사를 온 건, 남편의 발령 때문이었다.
겨우 두 달 남짓한 주말 부부 생활이 아이들의 정서에 좋을 것 같지 않아, 호기롭게 결정했다. 내려가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모든 일이 곧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가장 반긴 건, 이사가는 도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부모님이었다. 아들을 서울로 대학 보내고, 한번도 곁에 살아보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 분들이 안 계셨다면 마음 놓고 남편을 따라 내려오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나는 아이들의 이마를 두어 번 쓰다듬어주고는 남편 곁으로 이사를 했다.
어떤 위치가 좋을지, 몇 층일지, 에어컨은 있는지, 채광은 어떤지, 공간에 따라 무엇을 준비하면 되는지는 모두 전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퇴근한 남편이 부동산을 돌고, 내가 인터넷으로 집의 위치나 상권 등을 찾아보는 식이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집으로 이사가는 일에 대한 낯섦에도 불구하고, 이사는 순조로웠다. 이사를 하고나니, 어디든 내 물건을 가져다 넣기만 하면, 결국은 내 집이 되는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 어린이집이 어디인지, 유치원은 어디인지, 마트는 어디인지, 갈만한 커피숍은 어디인지 찾아보느라 분주하게 지냈다. 여기 저기 가보면서 정을 붙여보려고 애썼고, 놀이터에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마치 미지의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처럼, 낯선 도시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내 얼굴에 비친 절박함 같은 걸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 같았다.
시부모님은 내 첫 이향이 꽤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인지, 괜찮느냐고, 여러 번 전화를 하셨다. 살기는 편한지, 장볼데는 있는지, 아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살던 곳과 달라서, 무언가 불편하리라고 애써서 걱정해주셨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여러 번 통화한 후에야, 그들은 안심된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셨다. 그래, 의연하게 해내고 싶었다. 두고 온 자리들이, 관계들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화를 끊고 나면, 얼마나 헛헛했는지.
솔직히 처음에는 이사가기만 하면, 알을 벗어놓고 나온 새들처럼, 속 시원하기만 할거라고 생각했다. 도시에는 내가 살아온 흔적들이 고여있어서 짙은 냄새가 날 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거기서 나고 자랐고, 거긴 내 인생에 더하거나 뺄만한 사람도 없어서, 그저 도망치는 것 외에는 어떤 결말도 소용 없을거라는 걸 알아채고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동시에 뿌리를 옮겨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예견하지 못했다.
분갈이를 한 뒤에는 물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고. 엄마는 말했다. 낯선 도시까지 쫓아와서 죽은 화분을 털고, 그나마 살아있는 몇 개의 식물을 분갈이 해준 엄마는 한동안 베란다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화원에 가서 영양제 좀 사라고 말했지만, 그냥 인터넷에서 시킬게, 하고 얼버무리는 나를 보고 눈을 흘겼다. 또 다 죽일래? 하고. 친정을 떠나서 너무 먼 곳으로 와버린 건 아닌가. 엄마의 안온한 그늘을 내 손을 차버리고. 이제 마음놓고 언제든 문을 두드릴만한 또 다른 집이 이 도시엔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호기롭게 결정한 이사가, 나를 자유롭게 할지, 아니면 외롭게 할지는 아직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언제나 남편 곁이 가장 환하다는 사실, 그것만 보기로 한다. 비록 새벽같이 출근하고, 새벽이 되어야 돌아오는 남편이지만, 아빠가 떠나자마자, 손톱을 물어뜯는 큰 애를 보며, 나만큼이나 너도 아빠를 그리워하는구나, 했다. 늦게라도 집에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그 사람의 빨래를 하면서, 그래도, 여기 다 같이 오기를 잘했다고. 너를, 나를, 홀로 두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그러니 견딜 수 있을거라고. 나는 오늘도 차를 타고 낯선 동네를 빙 둘러본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내 자리를 찾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