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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May 07. 2022

sweet surrender

누구보다 인격적인 그 분이 나를 성장시키는 방식

어렸을 때부터 책과 문학을 사랑했던 나는 비유나 역설을 잘 이해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 삶에 적용하는 것도 꽤나 잘 하는 편이다.


어느날 우리 집 수도가 고장나서 아랫집으로 물이샜다. 아빠는 일도 가지 못하고 그날내내 아침부터 수도를 고치고 아래층 이웃할머니는 깐깐한 딸까지 대동하고 올라와서 아빠에게 이것저것을 따졌다. 바쁜 일로 밖에 있던 엄마도 전화로 언성을 높였고 가족들 모두 물도 잘 사용하지 못하고 불편을 겪었다. 모든 걸 꾹꾹 참고 묵묵히 수도를 고치던 아빠도 어느새 언성이 높아지고 그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어느새 이 모든 일이 우리 가족이 걷고 있는 시간에 대한 비유로 다가왔다. 


수도가 고장난 건 우리 가족 하나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관에 여러 세대가 사용한 찌꺼기가 많이 껴서 물이 제대로 흐르지 못해 막히고 그게 다른 곳으로 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묵묵히 전문가도 아니지만 일을 해결하려고 중간에서 진땀을 빼고 이웃의 훈수를 듣고 있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래서 해결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중간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 어쩌면 우리 가족이 걷고 있는, 어쩌면 인간이 걷고있는 인생길에 대한 비유인 것만 같았다.


아빠가 대형교회에서 부목사를 할 때에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 네자매는 아주 어렸고 교회에 계시던 권사님 장로님들의 예쁨을 받았다. 그러다 아빠가 교회를 개척하고 그곳엔 아무 군중도 없고, 어떠한 주목도 귀여움도 박수받을 일도 없었다. 성도들이 떠난 교회에서 엄마 아빠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모습은 아무 해석의 틀도 형성되지 않았던 어린시절 나에게 치명적인 상흔과 혼란을 남겼다. 엄마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아빠에게 퍼부었고 아빠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모든 것을 조용히 감내하고 있는게 다였다. 때로는 아빠가 바보같아 보였고 때로는 아빠가 성자같아 보였다. 아빠는 택시일 음식점일을 하며 우리 가족을 건사하려고 노력했고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란 엄마도 청소일을 시작했다. 나는 그 시절 자주 새벽까지 혼자 교회에 있을 때가 많았다. 어느날 교회에서 잠을 잤는데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가로등이 하나도 켜지지 않은 오르막길을 홀로 걷고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발을 내딛으니 어느 순간 길에 하얀 벚꽃이 만발하기 시작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홀로 외로이 버려진 것처럼 교회에 있을때마다 난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나님께 관심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 옷자락이 나를 덮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야와도 같던 그 그 과정은 결코 단 한순간도 쉬운 적이 없었다. 내가 나로써 걸은 그 모든 광야길의 쓴맛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금이라도 밀려올 때면 감정적으로 동요했지만 바로 다음순간 내 마음은 차갑게 식어 인간이 의미를 찾고 여러 종교를 찾듯 이 또한 다 의미없는 위선이란 생각이 찾아왔다. 


또래와 타인으로부터 받는 평가와 반응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교 시절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비틀대는 그러한 가정의 상황, 사회가 나를 배려한다는 상황에 대한 자조감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그래도 난 한번도 좌절하고 굴해 멈춰서있던 적은 없다. 쓴눈물을 삼키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쓴맛으로 다한 나의 최선은 어떤 결과로도 보상되지 못하고 더 큰 쓴맛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좋은 결과에도, 사람들의 박수와 인정에도 진정한 기쁨과 달콤함을 맛볼 수 없었다. 


지금껏 내 삶을 나 혼자 살았다, 그런데 앞으론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쓰디쓴 생각들이 나의 가슴바닥에 잔잔히 깔렸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나의 최선을 쥐어짜 혼자 고군분투 하라고 한다면 언제라도 당장 두손두발 다 들고 더이상 못간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문득 돌아보면 인생이 너무 공허하다. 그 모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취한 것들, 업적들, 사람으로부터의 인정, 그래 순간 행복하고 좋았지만 그것들로는 결코 나의 그 무엇도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 완전한 우주미아의 순간,  아무 공기도 없어 숨을 쉴 수 없는 숨막히는 순간, 그런 순간이 오면 내가 한때 지식적으로 존경했던 여러 사람들의 마지막 선택을 가슴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성장이 있었다. 숨막히는 자아에서 조금씩 벗어나 고개를 들고보니 인간이란 모두 외로운 인생으로 자기만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보인다. 인생을 사는 것이 누구에게라도 쉬웠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고도를 기다릴 필요도, 에이미가 varlerie를 그토록 애타게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내 인생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인생이 정해진 길 없는 광야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프시고, 수화기 너머 엄마가 감정적으로 굴때마다 어린시절 내가 받은 상처들이 무섭도록 상기된다. 태평양 건너의 이 생활 역시나 꽃밭은 아니다. 아무도 밟아본 적 없는 광활한 은하와 같은 이 생활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고 서있는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어디에 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란 걸 안다.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누구와 있는가가 중요하다. 


눈뜨고 봐줄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고멜과도 같은 나를 헵시바로 부르신 분을 내가 한번은 만나보고 싶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진짜인지 내가 꼭 알고 싶다. 지금껏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니 그저 없는 것이라 치부하고 살았지만, 이제 내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이해 너머에 계신 그 분을 내가 한번은 만나봤으면. 내가 목사의 딸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이어서도 아니라 그분의 온전한 주권으로 나로 부르셨다는 말을, 나까짓게 너무 소중해서 아들로 값을 주고 사셨다는 그 사랑을 단 한번이라도 내가 진정 느껴보고 싶다. 부자 청년이 그러했듯 내가 이미 가진 것들이 너무 귀해 예수님은 그저 아쉽지만 스쳐지나가는 인생이 아니라 향유옥합을 깨트려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그 여인이 누린 복을 나 또한 누리고 싶다.  


happy suffer, sweet surrender 

이 세상 그 어떤 선생님보다 인격적인 그 분이 일하시는 방식에는 억지가 없다. 죽어도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이끌고 강제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누구보다 나의 자유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러지 않을 수 있는 자유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을 때 그 누구보다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지금껏 걸었던 쓴 시간들을 또 하나의 비유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랜 시간동안 나를 기다리셨을 그 분에게로 내 발로, 내 의지와 자유로 가고 싶다. 내가 성장하기를, 내 믿음이 자라고, 내가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셨을 그분에게로 이제 가고 싶다. 작은 바람, 순간의 감정에도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던 새싹에서 이제 단단히 뿌리를 내린 믿음으로, 어떤 bitterness와 의심과 회의도 이겨내는 꽤나 듬직한 나무로 자라나고 싶다. 겨울을 끝내고 이제는 봄으로 또 여름으로, 그리고 또 다시 아무 꽃도 피지 않는 추운 겨울이 온대도 그분과 함께 손잡고 걷고 싶다.  


비쩍마른 심령의 이 광야길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하나님만을 갈망합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그 사랑만이 나를 숨쉬게 합니다. 내 자아를 위한 의미찾기의 일환이 아니라 나의 존재 이전부터, 태초부터 나의 아젠다와는 상관없이 계셨던 그 영원하신 분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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