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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Nov 22. 2023

영화 [버드박스]

삶은 눈에 보이는 것 그 이상이다


문득 꼭 생각나던 한 영화의 장면이 있다. 작은 아이 둘과 그 앞의 여자. 모두 조난자의 행색이고 방안은 어둡다. 여자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여자의 눈엔 눈물이 맺혀있을 정도로 아주 간절하고 심각하다.


지금부터 우린 짧은 여행을 갈건데 아주 힘든 여행이 될거야.
아주 오래 여행하는 것처럼 느껴질거야.
계속 긴장하고 있기 쉽지 않을거야.
조용히 있기는 더 어렵겠지만 두가지 다 해야해.

"We are going on the trip now. It's going to be rough. It's gonna feel like it's going on for a long time, so it's gonna be stay alert. It's gonna be even harder to be quiet, but you have to do both."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그 무엇

'이것'의 출현에 돌연 도시는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오로지 미치광이 혹은 정신이상자들만이 이것을 보고도 자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안대를 한 이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도록 부추긴다. 이 참혹한 광경 속 맬러리의 동생도, 한번도 슬퍼보인 적 없던 그녀의 동생도 이것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겨진 맬러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밀폐된 집으로 몇 사람들과 몸을 숨기게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목숨을 끊게하는 아름다움이란 대체 무엇이라 상상할 수 있을까. 먼저 간 이들로부터의 이제그만 이리로 넘어 오라는 아름다운 환청일까 아니면 한번도 가본적 없는, 그래서 가보지않고는 못배기는 미지로부터의 황홀경일까. 무엇일지 한마디로 형용할 순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공포스러운, 나 역시 마주친다면 반드시 죽음으로 몰고갈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흔한 재난영화 혹은 종말영화정도로 치부하기에는 이 난리통 속에서도 사랑과 성장이라는 주제의식이 촘촘히 들어짜여져있다. 그리고 그 짜임을 가능케 한 산드라 블록의 연기가 정말 명품이었다. 영화 초반, 공동체와의 연을 차단한 채 집안에서 '사람들간의 관계단절'이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녀가 이제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줄 알고, 또 그로 인해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알게 되어, 또 누군가를 살리기를 선택하는 과정이 이 영화가 단순 종말영화가 아닌 이유일 것이다.




희망없는 생존은 사는 게 아니다

인류의 멸종을 목전에 두고 톰과 맬러리가 싸우는 장면이 참 재미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사회 속 아이를 둔 여느 부부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린아이가 응당 누려야할 꿈과 환상은 배제된 채 창백한 삶만이 주어진 보이와 걸에게 톰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름다운 자연, 구름, 어린 아이들, 그리고 큰 나무를 오른 이야기를. 그런 것들은 쓸데없는 희망이자 현실을 가려 아이들을 외려 죽게할지도 모른다는 맬러리의 말에 톰은 응수한다. 인간이라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살 소망을 품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무언가 더 나은 무언가를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대체 이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아이들을 언제고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절망스러운 상황이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들을 온전히 사랑해주어야하지 않느냐고.


삶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현재가 어떤 모습이라 할지라도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기대하고 미래에 소망을 품음으로써 삶은 지속된다. 한참을 목소리를 높이며 맬러리와 다툰 톰은 결국 돌아누운 맬러리를 품에안고 조용히 이야기의 마지막을 들려준다. 아이들에게 끝맺어주지 못한 그 이야기. 나무의 끝에 올라 목격한 몇마리의 새들과 그 둥지에 대한 이야기를. 어쩌면 톰의 눈에 맬러리 역시 아름다운 이야기가 간절히 필요한 한 아이로 보인 것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웠던 두 배우의 케미


길지도 않았던 이 흑인 남자의 액팅을 통해 나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정말 그런 것이다. 어린날의 희망과 소원 중 정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되었던가. 아름답고 생각한 것들중 정말로 끝까지 아름답던 것이 과연 얼마나 되었던가.


그 자유로움에 오랫동안 동경했던 가수는 마약에 취해 자기 삶 하나 어쩌지못해 결국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에 갔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겠다며 미국의 한 공립학교를 세운 설립자는 몇년 지나지 않아 학교 돈을 횡령했다. 나로 하여금 살고 싶게 만들어 놓았던 작가는 가족을 뒤로하고 결국 총으로 생을 마감했고, 흠모했던 먼 나라의 가수도 돌연 목숨을 끊었다. 돌이켜보면 꿈과 희망에, 아름답다 믿었던 것들에 뺨을 맞은 것이 셀 수도 없을 지경인데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또다른 희망을 품지않으면 살지못하는 것일까. 부여잡은 뺨이 얼얼하다못해 피가나도 희망에 손을 떼지못하는 것은 대체 어떤 지독함이란 말인가. 톰이 떠났을 때 맬러리가 그러했듯,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숨죽여 울게되는 이런 고통스러운 어느 날 밤에는 문득 그러한 것들이 다시 궁금해진다.


그렇게 사랑을 들려주었던 톰은 결국 강아래로 떠나는 마지막 여정에 함께하지 못한다. 남은 두 아이와 맬러리만이 그동안의 생존에서 배운 것들을 가지고 작은 배에 몸을 싣게 된다. 그러다 숲속에서 아이를 잃었을 때 맬러리는 아이를 목놓아 부르는 대신 톰이 끝맺어주지 못했던 이야기를 고백한다. 이야기를 듣고 어디선가 아이가 자기를 찾아오기를 바라며. 톰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있다는 희망을 담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잠잠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간절한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이는 맬러리에게 돌아올 길을 찾는다.



그 공포스러운 여정의 끝에 그들은 한 공동체에 도착한다. 보지 못하기에,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 그 무언가의 영향도 받지 않는 안전한 어떤 곳이다. 그곳에는 새들과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결국 맬러리는 톰이 들려준, 그리고 자신이 걸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두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영화는 막을 내린다.



한 여자와 두 아이가 눈을 가린채 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왜인지 인생에 대한 거대한 비유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맬러리가 아이들을 향해 말하던, 이 여정은 힘든 여정이 될 거라던 그 간절한 외침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그 장면들은 마치 내 삶이 두 눈을 가린채 아이를 데리고 강을 건너는 것처럼만 어렵다못해 공포스럽게 느껴질 때면 그렇게 생각이 나나보다. 그 생에의 의지와 간절함이 나를 다시 삶으로 초대하는 것만같이 느껴진다.


보이는 것 이상을 꿈꾸며 사는 것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용기가 필요하다. 또다시 다치거나 잃을 것을 알면서도 길을 떠나야하는 것이기에. 그럼에도 삶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 끝을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지만, 맬러리가 본 그 아름다운 세상을 나도 보게 되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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