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않고 살아서 그 끝에 다다라보기를
어느 책의 날개글들을 무심히 읽어나가다 이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분다, 가라. 제목자체로 한 편의 시같은 책이다. 다 듣고 나면 인간의 깊은 어딘가를 결국 울리고야 마는 한강의 이야기를 또 한번 듣고싶어졌다.
이런 시간.
어린 동물처럼 연약해진 삶이 떨며 손바닥 위에 놓이는 시간.
국수 그릇에서 아직 김이 오른다. 희고 반투명한 열기가 끈질기게 피어오른다. 낮게 너울거리다 사라진다. (p. 128)
오랜 친구였던 인선의 죽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의혹을 추적하는 정희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죽음을 뒤늦게 쫓아가며 정희는 경악할만한 삶의 진실과 비의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 역시 알만큼 알고 겪을만큼 겪었다고 생각한, 이제는 무디어질 때도 된 생에 산재한 고통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에 인주의 삶이 또 얼마나 예측할 수 없이 둘러싸여있었는지 가장 친밀했던 정희조차 그것을 가늠하지 못한다.
예측할 수 없는 타인의 죽음, 일상에서의 사소한 폭력과 강압들, 스스로는 도저히 어쩌지못하는 인간의 병약함과 때로는 주체할 수 없이 끌어오르는 인간의 내밀한 욕정까지도 한강은 숨김없이 그려낸다. 마치 그것도 당신 생의 한 부분이라는 걸 인정하라는 듯이. 수백명의 인간이 있다면 수백개의 진실이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삶에 펼쳐지는 진실의 양태는 한 명의 인간이 감히 안다고 추측할 수 없을만큼 무한하다. 그렇기에 감히 한 인간의 죽음을 또는 살았던 흔적을 무엇이라 단언하고자 하는 정희의 노력은 책의 중반부에 다다를수록 더욱 헛되어보인다.
인주와 정희 사이에는 혈우병을 앓는 인주의 외삼촌이 있다. 답답하고 무디기만한 정희의 가족사, 엄마도 아빠도 없이 서로를 의지해 살아내야했던 인주와 그 곁의 병든 삼촌. 어느순간부터 셋은 서로에게 기대어 젊은 날을 보낸다. 세 사람은 먹과 바람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감자와 계란을 삶아 먹는다.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인주의 가벼운 몸동작을 뒤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선선한 저녁엔 같이 산책을 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정희와 삼촌은 서로를 향해 조심스레 연모의 감정을 키워나가기도한다. 그토록 조심스럽고 아름답게만 그려진 시절기억들에 생은 어느날 무심히도 침을 뱉는다. 어느날 한참만에 정희를 찾아온 인주는 말한다. 삼촌의 뼛가루를 뒷산에 뿌렸다고.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득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p.64)
삼촌은 떠났고, 인주의 삶에도 정희의 삶에도 구멍이 생겼다. 그 구멍이란, 이미 인주에게는 자신의 엄마를 잃었을 때, 그리고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 아빠라는 사람을 잃었을때, 이미 생겨있었을 무언가였다. 평생을 술에 의지해 (작품 속 표현처럼) '쓰레기'같이 살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 인주모에게도 그 구멍이란 스스로 낸 무언가라기보다 누군가가, 또는 생이라는 이름을 쓴 제 3의 힘이 가엾은 인간에게 장난처럼 낸 무언가였을 것이다.
방금, 꿈에 우리는 만났지. 꿈에서도 어둑한 새벽이었지.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았지. 무게도 냄새도 소리도 없이 삼촌은 서 있었지. 이상하지. 삼촌은 고작 서른일곱에 죽었는데,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어. 너무 짧은 꿈, 어떤 내용도 없는 꿈이었지. 손을 뻗어 잡지 못했지. 말 한마디, 눈짓 한번 주고받지 못했지. 사라졌지. 깨어났지.
왜 가끔 이렇게 오지 않았어? 아무 말 없이라도 나타나주지 않았어? 그랬다면 좀더 견디기 쉬웠을 텐데. 환멸을, 증오를, 고통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그 여자만큼이나 부서진 정희의 얼굴을 (p. 373)
어느날 꿈에서 삼촌을 만난 인주는 삼촌의 노트를 펼쳐 글을 남긴다. 구태여 소리내어 누군가에게 표현해본 적 없어도 사실 나 아프다고. 당신이 떠나고 나서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엄마도, 아빠도 없이 삼촌과 서로만 의지한 채 살았을 인주의 삶에 삼촌의 빈자리, 그 새하얀 공백과 공허가 느껴진다.
바람이 쉬지않고 분다. 거짓말처럼 곁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미시령 고개에서 버스사고가 났을 때, 동선의 엄마는 동선의 생명을 구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고개 아래로 떨어져내릴 듯한 버스에 마지막으로 남은 동선은 홀로 이를 악물고 땅쪽으로 뛰어내린다. 동선의 젊은날, 뱃속 아이의 아빠가 차에 치여 눈앞에서 즉사한다. 자신의 남동생이자 딸 인주의 삼촌인 동주는 여전히 병들어있다. 어린 인주는 어느날 고통에 취해 삶으로부터 숨은 엄마를 옷장 속에서 찾아낸다. 동선은 그렇게 죽은듯이 살아가다 결국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인주의 결혼생활은 깨지고 정희는 가정이 있는 남자를 만나 아이를 세번이나 유산한다. 정희는 남자에게 발길질과 목졸림을 당한다. 인주의 딸 민서에게는 그토록 끔찍한 삼촌의 병이 유전되었다. 바람은 결코 멎지 않는다. 단 한번도 멎은 적 없다. 그래도 가야한다. 살아내야 한다. 삶에는 연습경기도, 잠시멈춤도 없다.
...너만 한 나이였어.
이 년 가까이 스테로이드 제제로 치료를 받았지. 부작용으로 온몸이 백 킬로그램 가까이 부풀어 올랐어. 견디기 어려웠어. 그렇게 육중한 몸으로, 조그만 상처도 내지 않으려고 절절매면서, 어린 누나가 안간힘을 다해 벌어오는 돈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 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그게 무서워서, 꿈속에서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p. 344)
아파서 힘들었던 적은 없었냐는 정희의 새삼스러운 질문에 삼촌은 어느날 잠잠히 대답한다. 차라리 죽는게 나을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고. 한번 피가 나면 멈추지 않는 병에 걸린 탓에 맘껏 뛸수도, 맘껏 칼질을 해 음식을 만들거나 운전을 할수도, 세상을 내 것마냥 한번 자유로이 뛰어나가볼 수조차 없었던 삼촌의 기구한 삶은 그의 긴 독백으로 압축된다. 삼촌은 자신이 드디어 죽은 그 꿈 속에서야 맑은 개울물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그러나 또다시 물 속의 파란 돌 하나를 줍기 위해선 꿈이 아닌 삶이 계속 되어야 한다는 가슴 서늘한 진실을 깨닫는다.
그렇다. 삼촌의 표현처럼 가끔씩 산다는 것은 사람을 무섭게 만든다. 눈 뜨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란 본질적으로 누구에게나 제한이 있는 자유이다. 육체적인 병의 유무와 무관하게, 한 명의 인간이 태어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결코 누구에게도 무한하지 않다. 그러나 그마저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든 눈을 뜨고 살아가야한다. 아무리 무서워도 생생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어떤 일입니까?
인주가 왜 죽었는지 알아내는 거예요. 그 죽음을 왜곡하는 사람들을 막는 거예요.
그리고?
거짓으로부터 인주의 아이를 보호하는 거예요. (p.263)
정희는 말한다.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한다고. 그녀의 대답은 폭풍과도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나가야하겠느냐는 우리의 절규어린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읽힌다. 정희는 바람이 모질게 불어도, 강석원에게 무참히 폭력을 당하고 주거침입을 당해도 진실을 밝히겠다는 발길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노란 위액이 나올때까지 속을 게워내고 자신이 평생 쓴 모든 글이 담긴 외장하드가 물에 잠기어도 멈추지 않는다. 결코 어느 선에서 포기해 주저앉아버리지 않는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친구가 스스로 삶을 포기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보인다. 그리고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살아가야하는 인주의 핏줄, 민서를 보호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희의 멈추지않음은 과연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무엇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이 너무나도 홀로인 여성이 대체 어디서부터 이런 동력을 얻는단 말인가. 판타지장르가 아니라면 이 책은 나에게 이것을 해명해야했다.
정희와 인주, 그리고 주변인물의 삶을 둘러싼 살풍경한 고통들은 실은 누구도 제대로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단지 아픈 삼촌이 세상을 떠나서만도 아니고 어느날 갑자기 허벅지에 장대가 찔려 운동선수의 꿈을 포기해야 해서만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달의 뒷면'같이 누구나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결코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서로에게 서로의 고통 역시 달의 뒷면같이 보일듯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은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그렇다. 확실하게 관찰하고 그 특징들을 정의내릴 수 없는 달의 앞면과 달리 달의 뒷면과도 같은 고통들은 스스로에게도 때때로 의문스럽고 알수없는 무언가가 된다.
『 닥쳐』는 무대에 올라간 내 첫 희곡이었다. 심리치료의 임상 사례에서 모티프를 따온 것으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은밀히 학대받았던 여자가 주인공이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곧 지배당하는 것이며 자신을 잃는 것이라는 공포 때문에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데, 어느 날 수수께끼 같은 남자를 만나 그가 제안한 '닥쳐' 게임을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닥쳐'라고 응수하는 것이 그 게임의 유일한 규칙이다.
이리 와. 내가 사랑해줄게.
닥쳐. (조그만 목소리로, 겁먹은 듯이)
내가 돌봐줄게, 부드럽고 아늑하게. 너는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닥쳐.
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닥쳐.
네가 살아갈 수 있는 건 오직 나 때문이야. 너라는 존재만으론 아무 의미도 없어.
닥쳐.
너는 인형이야.
닥쳐.
너는 쓰레기야.
닥쳐.
나에게 너무하는구나.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
(눈물을 흘리며) 닥쳐.
네가 불행한 게 내 탓이란 생각은 마. 내가 아니라 누구를 만났어도 네 인생은 똑같았을 거야.
닥쳐.
네가 형편없기 때문이야.
닥쳐.
네가 더럽기 때문이야.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야. 끽소리도 못내는 병신이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아. 닥쳐
너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닥쳐
너는 살아있지 않아.
닥쳐.
너 같은 건 차라리 죽는게 나아.
(울부짖으며) 그렇지 않아...... 닥쳐!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던 여자가 어두운 객석을 향해 천천히 돌아앉으며 말한다. 혹시,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여자는 희미하게 웃는다. 내가 아픈 데는 달의 뒷면 같은 데에요. 누구에게도, 당신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p.248)
정말 이상하게도 책의 어느 부분에 다다르게 되면, 그러한 달의 뒷면같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결코 쓰러진채로있지만은 않은 한조각의 생명이 깃들어있음을 느끼게 된다. 정희가 쓴 희곡처럼 무차별하게 폭언과 폭력을 가하는 생의 장면장면마다 정희는 조용히 외치고 있는 듯하다. 닥치라고. '너는 살아있지 않다'는, '너 같은 건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의 칼날같은 폭언앞에 결국 무대 바닥에 엎드리게 될지라도, 닥치라고. 결코 네 말이 맞지 않다고. 나는 결코 연약하기만 하지 않다고. 그러한 광기어린 무대 위 대화끝에 결국 남는건 씁쓸함일지라도, 실상은 삶의 신경질적인 발길질아래 차이면 차이는대로 굴러야하는 것이 인간일지라도, 닥치라는 외침은 멈추지 않는다. 결국 정희라는 인물이 진실을 추적해가는 동력 역시 그러한 가늘고 긴 생에의 의지, 백 번 발길질 당해도 백 한번 일어나 기어코 갈 길을 가고마는 불굴의 생명력인 것이다.
생, 죽음, 고통, 욕정, 눈물, 희구, 구원.....그 모든 진저리나는 인간사의 뼈아픈 생리와 한 사람의 우주 속 비극들을 한강은 묵묵히 이야기 안으로 포섭해 그려낸다. 이젠 어떡하느냐는 호들갑도, 비통한 눈물 한방울도 없이. 무엇이 어떠해야한다 식의 생뚱맞은 가치판단도 하나없이 우리 앞에 그저 생의 양태들을 묵묵히 펼쳐놓는다. 그리하여 결국 독자가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토록 고통스럽지만 다시한번 길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기이한 열정이자 삶에 대한 애착이 된다.
있지, 새벽은 이상해...
어떤 물결이야. 어떤 핏줄, 어떤 생명 같은 거......두근거림 같은 거. 빠담! 빠담! 빠담!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심장 뛰는 소리야.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아니라, 쿠쿵! 쿠쿵! 쿠쿵! 새벽은 그래. 심장처럼 뛰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게 내 안에 있어. 그게 느껴져.......내가 미친 것 같니? 이상한 것 같아?
(p.251)
삼촌을 잃고 몇년간을 집에서 나오지 않던 인주는 어느날부터 정희네 식당일을 돕는다. 새벽까지 일하고 신발 뒷축을 꺾어신은채 절뚝절뚝 걸어 함께 돌아오는 길에 인주는 정희에게 말한다.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게 내 안에 있다고. 인주의 이 무심한 고백에서 그제서야 나는 간신히 희망 한줄기를 붙들게 된다. 아무리 고통에 절여진 인간일지라도 그 안에는 생명력이 잠들어있음을 보게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지 이 작가가 그린 허구 속 이야기만은 아님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삼촌의 빈자리가 무서워 밤마다 미친사람처럼 온 동네를 뛰고 또 뛰지만 인주는 매일밤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살아있음으로부터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버려진 것같은 비참함 속에서도 살아있는 한, 심장이 뛴다.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작가는 대답한다. 미치지 않았다고. 그게 생이라고.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나간다는 책의 종언처럼 마지막 책장을 넘기면 결코 마음은 어둡지만은 않다. 누구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그 생과 명, 아무리 고통스러운 생일지라도 함부로 그 마지막을 단언할 수 없는 엄숙함을 품고 또 얼마간 살아갈 수 있을것만 같다.
한강의 책을 읽은 날에는 꼭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이 든다. 글이 아니어도 무언가를 남기고 그걸 결코 잊지않고 싶단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무언가를 처음 본 사람처럼. 아마 작가도 그런 마음으로 이 이야기들을 써내려갔을 것이다.
어느 대목에서는 더이상 읽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가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것이 결코 고통으로써만 끝맺어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끝끝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게 된다. 삶의 비의들을 감히 감추지 않고 외려 그것을 더욱 생생히 정면으로 돌파함으로써만 그 고통을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연약해보여도 결코 비겁해지지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삶의 좋은 모습들이 더이상 그려지지 않을 때마다 이 사람의 책을 읽게된다.
별안간 나는 로스쿨 입시에 뛰어들어 졸업을 연기했다. 3주 남짓 남은 시험에 과연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과연 이 공부에 필요하다는 그 적성에 내가 얼마나 들어맞을지, 하나의 또다른 그 세계를 얼마간 또 깊이 잠수할 여력과 용기가 내게 남아있을지 사실은 아무것도 확신이 들지않는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먹고 살 길을 찾을거라고 하더니, 결국 찾았다더니 너는 좀처럼 확신이란게 없구나, 싶은 자조의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그렇다. 어쩔 수 없다. 안다고 생각해도 모르겠는게 내 마음이다. 지금은 모르는 걸 어물쩡 안다고 젠체하기도, 모르는 걸 어떡하냐고 더 뻔뻔해지기도 어려울 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바람이 불어도 기어코 가던 길을 가고 말았던 인선과 정희의 삶처럼 나 역시 어디든 가는 수밖에는.
그래도 남은 한해 목표는 세웠다. 한강 작가의 모든 책을 다시 하나씩 다 읽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