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멜랑꼴리한 말미잘
Mar 15. 2022
새로 전학하는 국민학교는 집에서 거리가 좀 있었다. 상명여사대 후문 언덕을 내려와 큰길에서도 버스 한 정거장이 넘는 거리였으니 말이다. 5학년인 유이와 4학년 인이는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1학년 연이가 다니기에는 좀 멀어 보이긴 하였다. 등교할 때야 언니들하고 가면 되지만, 끝나는 시간이 다르니 올 때는 혼자서 걸어와야 했다. 엄마 희가 데리러 가야 했지만, 남은 아이들 건사하랴 집안일하랴 그럴 형편이 못되었다.
낯선 길을 혼자 올 생각에 겁먹은 연이에게 윤은 걸어서 잘 다녀오면 상금을 주겠다고 달랬다. 돈으로 보상하는 경우는 이 집에서는 정말 흔하지 않은 경우였으나, 8살짜리 딸아이가 근 30분을 혼자 걸어 집에 돌아와야 하는 것은 큰 일이었다. 윤은 학교에서 집까지의 길을 여러 번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해주고 그 밑에 각서를 썼다.
"연이가 혼자서 집에까지 잘 오면 10원을 줌."
생전 용돈 한 푼 받아본 적이 없는 연이는 보상금 약속에 용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이들끼리 등교하는 첫날, 유이와 인이가 연이를 재촉한다. 세 자매는 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윤은 이미 출근을 했고, 희가 아이들을 배웅했다. 신발주머니는 희가 직접 만든 것이다. 빳빳한 천이 아니라 신축성이 있는 천으로 만든 것이라 실내화를 넣었더니 축 늘어져 바닥에 끌릴 것만 같다. 희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세 자매는 무사히 학교 앞에 도착했다. 큰 딸 유이는 이사 오기 전에 다니던 학교보다 새 학교가 후지다고 생각한다. 학교 건물은 오래되어 보이고, 아이들도 촌스러워 보인다.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도 색이 제각각이다. 아이들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이름표를 사야 했다. 이름표는 둥그런 무궁화 꽃 모양으로 안에 이름을 써넣게 되어 있고 가슴에 달 수 있는 핀이 달려있었다. 세 자매는 문방구에 쌓여있는 이름표를 놓고 어떤 색깔을 고를지 망설였다.
유이는 노란색을 골랐고, 인이는 가능하면 덜 튀는 색으로 하자 생각하고 하늘색을 골랐다. 연이는 전학 수속하러 왔을 때 구경했던 교실에서 아이들이 빨간색 이름표를 하고 있던 것이 기억나 빨간색을 만지작거렸다. 유이가 "분홍색이 이쁘지 않니?" 하며 연이에게 분홍색 이름표를 골라주었다. 연이는 약간 찜찜했지만 언니가 골라준 것이 예쁜 것 같았다. 유이가 대표로 값을 치르고 모두 가슴에 이름표를 달고는 각자의 교실로 들어갔다.
윤은 제시간에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오셨다!"
아이들이 조르르 달려 나온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용이와 필이 배꼽인사를 한다.
윤은 어머니 김여사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윗옷을 받아 드는 아내 희에게 물었다.
"애들은 학교 잘 다녀왔나?'
희는 쌩끗 웃는다.
"얼른 씻고 오세요. 저녁 다 되었어요."
할머니, 엄마, 아빠, 5남매, 그리고 삼촌(윤의 막냇동생)까지 9식구가 다 모인 저녁밥상이다.
연이가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아빠! 저 혼자서 잘 다녀왔어요!"
"그래, 잘했다"
"그런데, 언니가 이름표 잘 못 사서 애들이 막 놀렸어요"
인이가 거든다. "저만 제대로 달고 갔어요!"
연이와 인이가 동시에 떠들어대는데 김여사의 호통이 쏟아진다.
"밥상머리에서 누가 이렇게 떠드냐!"
아이들이 조용해진다.
"밥 먹을 땐 말하는 거 아니야. 얼른 밥 먹어" 희가 아이들을 타이른다.
유이는 조용히 밥만 먹는다. 윤은 그런 유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아내 희의 된장국은 언제나 맛있었다.
저녁식사 후, 연이가 각서를 들고 자랑스럽게 달려왔다.
"안 틀리고 잘 찾아왔어요!"
윤은 10원을 연이에게 주고 칭찬해주었다.
"이제 잘 올 수 있겠지?
"네. 근데 이름표 때문에 애들이 놀려서 창피해요"
"유이 언니가 제일로 창피했어" 어느새 인이가 와서 끼어든다.
"무슨 말이야? 차근차근 말해봐"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이름표의 색깔이 학년별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5학년 유이가 고른 노란 명찰은 2학년의 색깔이었고 연이가 고른 분홍 명찰은 3학년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인이가 고른 하늘색은 본인의 학년인 4학년이었다. 다른 학년의 이름표를 달고 온 전학생들은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특히 2학년 이름표를 단 유이는 첫날부터 아이들의 놀림을 받았던 것이었다.
"그게 뭐 큰 일이라고"
윤은 별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떠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금세 잊을 텐데 말이다.
유이는 아무 말 없이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역시 맘에 들지 않는 학교였다. 무엇 때문에 학년별로 이름표 색깔을 달리 했을까. 그런 것 정도는 마음대로 골라도 좋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그런 걸 가지고 놀려대는 아이들 수준도 별로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하지만 정든 동네와 친구들을 떠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방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것도 인이, 연이와 같이 써야 하니 좋다 말았다)
세검정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왠지 다시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생들은 옆에서 쉴 새 없이 종알종알거린다. 용이와 필이까지 와서 서로 때리고 도망가고 울고 난리법석이다. 시끄럽고 귀찮았다. 나는 왜 이리 동생이 많은 걸까?
"시끄러워! 나가 놀아!" 소리를 한번 빽 질렀더니 잠시 조용해지는 듯하더니 다시 시끄럽다.
"누나들 공부해야 하니까 나와." 희가 용이와 필이를 데려가려고 방에 들어왔다.
인이가 말했다. "문방구 아저씨가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몇 학년이냐고 물어봤으면..."
"그러게 말이다. 괜찮아. 내일 삼촌이 가서 바꿔줄 거야"
"네" 인이와 연이는 대답을 하는데, 여전히 유이는 책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큰 딸 유이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얻은 귀한 아이였다. 윤이 결혼할 때의 나이도 적은 편이 아니라 다들 아들을 바라고 있었지만, 집안의 첫 아이인 데다가 맏딸은 살림밑천이라고 유이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어머니 김여사는 항상 업고 다니며 동네에 자랑했고, 아직 출가 전이던 시누이들도 첫 조카를 무척 이뻐했다. 어쩌면 노처녀 시누이들이 결혼하기로 맘먹은 것도 조카들이 너무 예뻐서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이는 눈코 입이 오뚝하니 예쁜 아이였고, 똘똘했다. 집안일에 바빠 따로 공부시키지도 못하고 유치원도 안 보냈는데 학교 공부도 곧잘 했다. 국민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신입생들과 학부모들이 가득 찬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이 긴 훈화 끝에 말했다. "누구 나와서 노래 한 번 해볼 사람!!!" 수백 명의 아이들 중에서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유이였다. 아이들 대열의 뒤편에 시어머니와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서있던 희는 가슴이 덜컥했다. 노래를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식구들이 같이 듣는 라디오에 나오는 광고송을 따라 부르던 것이 생각났다. 인기 연속극이 시작하기 전과 끝나고 나면 나오는 00 간장 광고 노래를 유이가 자주 따라 불렀었다. 유이가 부르는 노래는 그것밖에 들은 적이 없었다.
'00 간장 노래를 부르면 어쩌지?' 불안한 희와는 달리 다른 학부모들은 기대에 차서 단상으로 올라가는 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 참 용기가 대단한데'
'누구네 집 딸래미인지 씩씩하네'
아직은 아기 같은 작은 몸집의 유이가 단상으로 올라갔다. 교장 선생님이 용기 있는 아이라 칭찬하는데, 희는 걱정이 되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내 유이의 씩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노래 가사도 완벽하게 잘도 부른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희도 정신없이 박수를 쳤다.
'잘한다. 우리 딸!'
불안하던 마음이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래, 누구 딸인데. 딸만 연속 셋을 낳고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이제 그만 자야지. 다들 가서 이 닦고 와" 희는 세 딸들에게 말했다. 어느새 세 자매는 나란히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아이들은 모두 책을 좋아했다. 그래, 열심히 공부하렴. 예쁜 내 딸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