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랑꼴리한 말미잘 Apr 28. 2022

꺼진 불도 다시 보자_의 추억

"엄마, 선생님이 내일 풀 가져오래요"

"풀? 미술시간에 쓰는 거야?"

"네. 연습장도 가져오래요"


  국민학교 2학년이 되니 가져오라는 게 많아진 것 같다. 연이의 주문에 희는 밀가루를 조금 덜어 풀을 쑤었다.  시어머니 김여사가 가래 때문에 상용하는 용각산 빈 통을 깨끗이 씻어 식힌 밀가루 풀을 담았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놓았던 광고지를 꺼내 들었다. 신문에 끼어오거나 길거리에서 나누어주는 광고지를 그냥 버리지 않고 모아둔 것이다. 특히 뒷면이 백지인 광고지들은 공책을 만들기에 훌륭한 재료가 된다. 백지를 앞면으로 하여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두꺼운 끈으로 단단히 묶으면 훌륭한 연습장이 되는 것이다. 조금 딱딱한 종이는 잘 접어서 필통을 만들기도 했다.

  연이는 엄마가 정성스레 싸준 풀과 연습장을 들고 학교에 갔다. 그러나 미술시간에 아이들이 문구점에서 사 가지고 온 물풀을 보니 차마 용각산 통에 든 풀을 꺼낼 염두가 나지 않는다. 스프링으로 매어진 앞 뒤 하얀 백지가 선명한 다른 아이들의 연습장을 보니 한층 기가 죽었다.

  할 수 없이 꺼내놓은 광고지 연습장과 밀가루 풀은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각종 광고지를 묶은 연습장을 들춰 보며 키득거렸다.

용각산 통 (원조)

"연이야, 이거 뭐야?"

"이게 풀이야? 용각산? 왜 약을 갖고 왔어?"

"나 이거 알아. 담배 피우는 사람들 먹는 거야. 너 담배 피워?"


  연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집에서는 하루 종일 종알종알 잘도 떠들지만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연이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용각산 통에 든 밀가루풀을 쓰려면 손가락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물풀 통을 손에 쥐고 쓱쓱 문질러 풀칠을 하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다가 누가 볼세라 몰래 용각산 풀로 붙이기를 했다. 손가락이 끈적끈적해진다.


  윤과 희는 근검절약의 살아있는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을 아껴 썼다. 허투루 쓰는 돈이 없었다. 화장실에는 휴지 대신 신문지가 정갈하게 오려져 있었고, 지하수로 빨래를 했고, 아이들 옷은 물려 입혔다. 그런 형편이니 크레파스나 스케치북, 물감 등 학용품을 아이들 마다 사주었을 리가 없었다. 유이, 인이, 연이가 모두 한 국민학교에 다니어서 공용으로 쓰는 물건들을 잘 나누어 사용해야 했다. 특히 수업시간이 겹치기라도 하면 낭패일 터였다.


"큰언니, 내일 꼭 스케치북이랑 크레파스 갖다 줘야 해. 4교시 미술시간이야"

"알았어. 몇 번을 말해"


  큰 딸 유이가 3교시 미술시간이고 바로 이어 4교시에 셋째 연이의 미술시간이 있는 날이었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들고 등교하는 유이에게 연이는 신신당부를 했다. 연이는 그리기를 좋아했다. 집에서도 광고지든 신문지든 빈칸이 보이면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연이는 주로 예쁜 여자 그림을 그리고 놀았는데, 만화처럼 이야기를 입으로 지어가며 혼자 잘 놀았다.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연이는 복도에 나가서 언니를 기다린다. 짧은 쉬는 시간에 유이의 6학년 교실에서 연이의 2학년 교실까지 왔다 가려면 빨리 와야 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유이는 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놀러 나가거나 화장실을 갔던 아이들도 교실로 모두 돌아오는데, 유이의 모습은 영 보이지 않았다. 수업종이 울리고 다들 자리에 앉았다. 연이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빈 손으로 자리에 앉았다.


"연이는 스케치북 안 가지고 왔어?" 선생님이 물었다.

"언니가...." 연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언.. 니..." 연이의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다. 선생님은 고개를 설레설레 지으며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오늘은 불조심 포스터를 그릴 거야. 잘 그린 사람에게는 상도 주니까 열심히 그려보세요"

  하필이면 오늘은 교내 불조심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자나 깨나 불조심'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아이들은 각각 표어도 써넣고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연이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시선은 교실 밖 복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라도 언니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지고 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다른 아이들은 벌써 밑그림을 끝내고 색을 칠하기 시작했다. 연이는 부러운 눈으로 아이들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아, 나라면 이렇게 할 텐데. 머릿속에는 어떻게 그릴지 구상이 다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제 수업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연이 눈에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뒷문이 살짝 열리더니 유이가 연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깜짝 놀란 연이가 유이를 쳐다보았다. 유이 얼굴이 좀 이상했다. 눈도 부어있었고 표정도 어두웠다. 연이가 뭐라고 한마디 말할 새도 없이 유이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연이에게 전달하고 쌩하니 사라졌다. 잠깐 멍해있던 연이는 서둘러 도화지를 펼쳤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밑그림을 그릴 새도 없이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불조심 표어를 강조한 포스터였다. 서둘러 바탕색인 노란색을 칠하는데 노란색 크레파스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연이의 작은 손가락으로도 크레파스가 잡히지 않았다. 연이는 노란색 크레파스 쪼가리를 손가락 끝에 붙여 열심히 칠했다.


"자, 이제 시간 다됐다. 다들 앞으로 가져와"


  다들 각자 그린 포스터를 소중히 들고 선생님께 가져갔다. 연이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까지 칠한 그림을 앞으로 들고 갔다.


  유이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어갔다. 아무래도 세수를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울어서 눈이 아직도 빨갈 것이다. 생각하니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꾹 참았다.

  유이는 내성적인 연이와는 달리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베스트 프렌드라고 할 수 있는 친한 친구들도 있었다. 발단은 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인 A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데서 시작이 되었다. ㅇ과장의 딸들은 용돈이라고 할 만한 돈이 없었다. 필요한 돈은 엄마 아빠에게 정확하게 출처를 이야기해야 했고, 어쩌다 친척 어른들이 오셔서 용돈을 주신다던가 하는 일은 1년에 거의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나는 돈이 없어"

"이 영화 꼭 보고 싶은데, 같이 가자"

"돈이 없다니까"

"내가 낼께"

"진짜?"

"응"


  그래서 같이 가서 본 것이 프랑켄슈타인 나오는 비급 영화였다. 그런데 영화를 본 다음 날이었다.


"유이야. 영화 본 돈 줘"

"뭐? 네가 보여준다고 했잖아"

"아니야. 빌려준다고 한 거야"

"무슨 소리야? 나 돈 없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빌려준 거잖아. 네 영화비는 네가 내야지"

"어머 얘 이상한 애야"

"이상한 건 너지! 왜 네 영화비를 안 줘?"

"나 돈 없어. 보여준다고 해서 본거야"


  A는 다른 친구들한테 유이가 영화비를 빌려가고선 갚지 않는다고 흉을 보고 다녔다. 유이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미술수업이 있던 그날, 결국 유이는 A를 데리고 운동장 뒤로 갔다.


 "너 왜 애들한테 내 흉보고 다니니?"

"네가 돈 안 갚으니까 그렇지"

"그건 네가 보여준다고 한 거잖아"

"네가 본 거니까 네가 내야지. 정말 뻔뻔하다 너"

"너 어떻게 친구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니?"


  결국 큰 소리를 내며 싸우고 말았다. 유이는 배신감이 들었다. 어찌 친구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한바탕 엉엉 울고 나니 이미 수업이 시작된 후였고 퉁퉁 부은 얼굴로 교실에 돌아가기도 싫었다. 수돗가에 가서 얼굴을 닦고 나니 좀 진정이 되었다. 돈만 있다면 확 줘버리면 좋겠는데.... 어디서 돈을 구한단 말인가.

  순간 연이 생각이 났다. 스케치북과 크레파스 꼭 가져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수업 시간은 이미 한참이나 지났다. 친구 들 거 빌려 썼겠지 싶었으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져다줘야 하지 않을까?

  유이는 힐끔거리는 아이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교실에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가지고 2학년 연이 교실로 갔다. 아이들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혼자서 죄지은 듯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연이가 보였다. 유이는 아무 말도 없이 연이에게 물건들을 주고 서둘러 나왔다.


  유이가 친구와 대판 싸운 것을 둘째 인이가 알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인이는 엄마 희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희는 유이를 불러 자초지종을 다시 물어보았다.


"난 진짜 걔가 내준다고 해서 간 거예요"

"알았다"


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유이에게 주었다.


"이거 갖다 줘"

"왜요? 걔가 거짓말한 건데"

"그래도 영화를 본 거니까 네가 본 영화비는 주는 게 좋겠다"


돈을 받아 든 유이는 억울함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억울해요"

"그런 친구들도 있는 거란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유이는 다음 날, 학교에 가서 A에게 보란 듯이 돈을 내던지며 말했다.


"분명히 네가 보여준다고 해서 본거야. 그래도 네가 달라고 그러니까 치사해서 준다. 이제부터 너랑은 끝이야"


  유이는 그 이후 A와 다시는 말을 섞거나 따로 만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교내 불조심 포스터 그리기 대회 결과 발표가 있었다. 연이의 포스터가 입상을 했다. 마감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급하게 그린 데다가, 노란 크레파스도 모자라 겨우겨우 색칠을 마친 포스터가 입상을 한 것이다. 1등은 아니었지만 연이는 참으로 기뻤다. (*)

매거진의 이전글 부원군이 되리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