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5-3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비누 사업을 할 때였다. 그때쯤 인연을 맺게 된 한 사람이 있다. 나는 그녀를 그저 류, 혹은 류 대표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사업 파트너로 만난 류는 내게는 때론 가족 같기도, 친구 같기도, 또 스승 같기도 한 존재다.
한창 비누 사업으로 불철주야 뛰어다닐 무렵이었다. 그날도 류와 함께 여러 장소를 이동하며 사업 차 미팅을 하느라 엄청나게 지친 상태였다. 빨리 예약해둔 숙소에 들어가 그저 뻗어 잠을 청하 고만 싶었다. 우리는 늘 버스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날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택시도 잡히지 않고. 어찌할 수 없이 폭우를 뚫고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가시거리도 확보되지 않는 폭우 속에도 우리는 지지 않고 비누가 잔뜩 든 엄청난 무게의 캐리어를 당기고 끌며 2시간을 걸어 예약한 호텔로 갔다. 호텔까지 가는 길이 지치기는 했으나 이제 곧 쉴 수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밀려와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긴 여정 끝에 드디어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비에 쫄딱 젖어 우리는 흡사 비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 프런트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호텔은 한국인을 받지 않는 호텔이었다. 나는 왜 한국인은 받지 않는 거냐며 곧 따지고 들 태세였는데 류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태평하게 한다는 말이,
“한국인을 아예 안 받는 건가? 허허. 좀 곤란하네. 그럼 방이 아예 없는 건데. 아쉽게 되었어.”
이 호텔에 오기 위해 폭우를 뚫고 장장 2시간을 왔다. 주변에 그저 아무 곳이나 잡아 쓰러져 자고 싶은 걸 꾹 눌러 참고 왔건만.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정말이지 나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류는 나의 이런 상태는 아랑곳없이 곧 다른 호텔로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주변에는 호텔은커녕 숙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길을 헤매던 우리는 작은 여인숙 같은 숙소를 간신히 찾아 방을 잡고 쉴 수가 있었다. (남은 방이 하나뿐이라 우리는 그날 같은 방을 쓰게 됐다). 나는 그날 류에게 물었다. 조금 전의 상황이 전혀 화가 나지 않는 거냐고. 그러자 류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아. 세상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는데 고작 그런 일에 화를 내고 감정을 쓰겠어? 그건 내 멘탈에도 별로 좋지가 않아. 그리고 우린 내일 또 많은 여정을 지나야 하는데 그런 일로 나의 컨디션을 망치고 싶진 않거든.”
류의 말에 방금 전까지 화가 나서 씩씩거리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또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잡아놓은 미팅이 연이어 펑크가 나는 날이었다. 미팅이 번번이 미끄러질 때마다 나는,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다고?’ 하면서 한껏 화가 부풀고 있었다. 그런데 류는 약속이 깨지는 상황에도, “오늘 시간이 안 돼? 허허. 그럼 다음에 봐야지 뭐. 괜찮아,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류가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렇게 낙심을 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인지. 어쩌면 저런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날의 일과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어느 카페에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중국까지 와서 아무런 성과도 쥐지 못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여전히 기분은 나아지질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와는 달리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습이라니. 참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퉁명하게 말을 던지며 물었다.
도대체 류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천하태평일 수가 있는 거냐고. 나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지 눈만 껌뻑이며 나를 바라보던 류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어대던 그녀는 웃음을 진정시키더니 자신의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류는 원래 광산 사업을 하는 사업가였다. 한 번은 좋은 광산에 투자를 하고 싶어 알아보다 마음에 딱 맞는 광산을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광산을 얻기 위해서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4,200m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3,000m까지는 차로 오를 수 있었지만 나머지 1,200m는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텐트와 각종 짐들을 등에 지고서 말이다.
류는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원주민들과 함께 산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일 시각에는 햇볕의 따가움을 견디고, 밤에는 영하까지 떨어지는 추위와 싸우면서. 또 길을 어찌나 험한지 절벽의 그 아찔한 길을 오르고 또 올라야만 했다.
광산에 오르는 길은 어려웠고 힘들었고 그만 내려가고 싶은 순간들이, 그저 다 내던지고 싶은 시간들이 순간순간 찾아왔다. 하지만 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제 키만 한 텐트를 지고 꿋꿋하게 등반해 마침내 산꼭대기 정산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후, 류는 몇 날 며칠을 그곳에서 추위와 싸우며 원주민들 사이에서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고 한다. 자신이 정복한 광산에서 어떻게든 성과를 손에 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류는 그곳에서 버티는 동안 너무나 힘든 마음에 ‘내가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싶어 눈물이 나기도 했고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광산 아래로 뛰쳐 내려가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목표가 있었기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고 결국은 그 광산을 손에 쥐게 됐다고 했다.
또 사업을 하다 보면 어떤 날은 추운 날씨에서 보일러도 없고 창문도 없는 그런 여인숙에서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말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없고 침대 하나만 있어도 잠을 잘 수 있다고. 어떠한 환경 속에 놓여 있을지라도 그저 내가 세운 목표에만 오직 집중을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류는 말했다.
“오(나를 부르는 말), 이런 걸 몸에 익혀둬야 해. 사업하는 사람은 뭐든 버티는 힘과 그 버텨내는 방법을 몸에 집어넣는 게 아주 중요해. 지금 이런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배워야 하는 거지.”
류는 자신에게 온 고난과 실패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류에게서 배운 것은 바로 ‘멘탈 근력’이었다. 일이 잘 안 풀려도 불평불만을 하기보다 그 시간에 다른 일에 대한 구상을 하는 일. 쓸데없는 감정에너지를 아끼는 일.
무엇보다 내 정신적인 컨디션을 해치는 감정들을 빨리 털어내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하는 일.
물론 류도 사람이기에, 모든 일에 다 낙관적이고 화를 내지 않고 무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표출하기 적정한 ‘때’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도 될’ 때와 ‘하면 안 되는’ 때.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얻은 멘탈 근력일 것이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지금. 나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그때 류와의 일들을 더듬어본다. 지난 시간들을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심기일전을 외치기도 하고 아등바등한 감정도 좀 내려놓고 괴로운 마음을 다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어려운 시간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고 살아가는 일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결국 승리하는 방법을 얻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