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성부 Sep 21. 2020

나는 소중하다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5-5

이상한 서울 나라의 이방인 - 오성부

스물일곱. 부푼 마음으로 사회에 입성을 한 사회초년생, 신입사원 시절이었다. 무언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열정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가득했던 시절. “시켜만 주신다면!”, 혹은 언젠가 TV 광고에서 한 열혈 청년이 힘차게 외치던 “꼭 가고 싶습니다!”와 같이 “그게 뭐든 어디든 꼭 하고 싶습니다!”의 불타는 마음으로 활활 타오르던 그 시절. 


푹 꺾였던 고개도 치켜세우고 굽어졌던 어깨도 좀 활짝 열고 구김살 제대로 팍팍 박혀있던 얼굴도 빤빤하게 펴서.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굴하지 않고 단단히 맞설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말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나의 이런 마음과 열정과 또 다짐했던 자신감 같은 것은 첫 미팅, 그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생전 처음 업체와 미팅이라는 것을 해보았는데 그날 첫 만남, 첫 순간부터 나는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다. 명함 때문이었다. 상대가 나를 보고 처음 내민 것은 자신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그것, 명함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명함이 없었던 때라 그저 내 소개를 입으로 구구절절 소개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정작 열심히 준비를 해간 내용에 대해서는 브리핑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마음속에서부터 이런 말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과연 내 말을 믿어줄까?’, ‘명함 한 장도 내밀지 못하는 나를 뭘 믿고?’, ‘내가 하는 말은 정말 진실인데... 진정성이 안 느껴지면 어떻게 하지?’와 같은 것들이었다. 


첫 미팅을 그렇게 망쳐버리고. 사무실에 돌아와 어깨를 잔뜩 늘어뜨리고 있는 나를 보며 사장님이 왜 그렇게 진이 다 빠져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사장님에게 미팅 때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껄껄 웃으시며 당장 명함부터 파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내 손에는 과장 직책의 된 내 이름 석 자가 떡 하게 박힌 명함이 생겼다. 그때 어찌나 벅차고 기쁘던지. 그리고 나는 그 후로 어디에서 누굴 만나든 자신 있게 명함부터 내밀게 됐다. 그리고 상대가 내 명함을 받아 든 그 순간,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함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누군가에게서 명함을 받아 들어도 그냥 형식상으로만 느꼈었는데. 그래서 명함이 주는 위력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명함 한 장에 이런 힘이 숨어 있었다니. 


그때의 명함 덕분에 나는 새삼 나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이 회사에서 얼마나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맡고 있는 사원인지 말이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장난으로라도 나 따위가, 말단 나부랭이가, 사원 주제에, 같은 비하 발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에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고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일이 한 가지쯤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 새로 맡은 회사의 이름으로 새 명함을 만들었다. 그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간의 참 많은 시간들과 세월들이 이 안에 들어 있다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가슴 깊은 데에서부터 뜨끈한 것이 올라와 온 몸에 퍼져나갔다. 


내가 가진 직함이라는 타이틀은 참 대단한 힘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조금 지쳤던 어깨가 펴지고 그간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옥죄었던 가슴도 조금 느슨해지고 많은 생각으로 뒤엉켜 있던 머릿속도 맑아진 느낌이었다. 새삼 나 스스로가 참 자랑스럽게 여겨졌고 아주 소중한 존재로 다가왔다. 


잊지 말자. 나는 내가 속한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맡고 있는 사원임을. 어느 자리에서는 내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이 됨을. 그리고 내 회사에서 어느 시간 때에는 중책을 맡고 있는 한 인물임을.     


최근 종영한 어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상대에게 이렇게 외치는 장면이 있었다.  

    

“자기 값어치 헐값으로 매기는 호구 xx야. 내 가치를 네가 정하지 마!”     

나는 지금, 얼마짜리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작가의 이전글 손해 계산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