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작은 불씨
좌우, 왼쪽 오른쪽, 좌향좌 우향우.....
학창 시절, 운동장 조회 때나 교련 시간에 들었던 이 지시어에 나는 자주 방황하던 방향치였다. 친구의 뒤통수가 아닌 얼굴을 보게 될 때의 민망함은 구구단을 못 외워 나머지를 했던 9살의 어느 날만큼이나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부끄러운 일들 중 하나였다.
그런 내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 운전면허를 땄다. 내 의지였다기보단 주변에서의 등 떠밀림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방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내려간 울산에서 아기 없이 지낸 신혼시절, 시간이 있을 때 따두면 편하지 않겠냐는 시어머니의 말씀에 마땅한 변명을 찾기가 힘들었다. 아기도 없고 시간도 많은데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동네 운전면허학원을 찾아 내키지 않은 용기를 내었다.
문제집을 두 번쯤 풀고는 필기시험을 보았다. 나는 필기시험장에서 만점자로 호명을 받았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저기 아가씨, 손 한 번만 잡아볼 수 있을까?"
"네?"
"나 세 번째야. 근데 또 떨어졌다. 기운 좀 나눠줘!"
시험장을 빠져나오는데 예순쯤 돼 보이는 할머니가 나를 따라오며 물으셨다. 얼결에 할머니에게 손을 내어드렸다.
'이걸로 면허증이 나오면 저도 좋겠어요.'
내 손을 잡고 쓰다듬는 할머니를 보며 당장 다음날부터 시작될 실기가 걱정되었다.
왼쪽 오른쪽, 좌회전 우회전......
직진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가르치는 강사님의 깊은 한숨소리가 좁은 차 안을 메웠다.
'강사님, 저도 이런 제가 참 답답해요!'
수업 내내 부끄럽고 답답했던 시간을 보내고 실기시험을 보던 날,
"합격"
그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운이 따랐다. 주행코스를 암기한대로 잘 가주더니 그렇게 안되던 주차까지도 그날은 제시간에 들어가 주었다.
"나 붙어버렸어. 무서워 죽겠는데 이제 운전해야 하나 봐."
농담인 줄 아는 친구가 전화기 너머로도 들릴 만큼 깔깔대며 웃었다.
자신의 차를 내어주며 운전을 해보라는 남편에게 어느 날은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어느 날은 약속을 핑계로 미뤘다. 좀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면허를 따고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늘지 않는다는 주변의 등 떠 밀림이 또 시작되었다.
남편 회사의 회식이 잡힌 어느 날, 낮시간에 차를 가져가 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다시 운전면허시험장에 앉은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삼산동을 떠나 무거동을 지나 울산 공업탑 사거리에 들어섰다.
뱅글뱅글.......
빠져나갈 타이밍을 좀처럼 잡지 못하는 나를 향해 큰 트럭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다. 뒤따라오던 차들도 클랙슨을 울려댔다.
세 바퀴를 더 돌았을까?
공업탑 뱅글뱅글 사선(?)을 나는 결국 넘지 못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남편 회사에 차를 가져다 놓고는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만 두 돌이 지난 셋째를 아파트 1층 어린이집에 보냈다. 방송대 공부를 시작했다. 미뤘던 독서모임을 시작하고 평생교육원 수업을 2개씩 신청했다. 수업을 듣는 동안 나는 누구의 엄마가 아닌 예전 내가 불리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3년의 시간 동안 10개가 넘는 수업을 수강했고 수업마다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 수집가냐고 남편이 놀림에도 나는 꿋꿋이 자격증 수집에 열을 올렸다.
“선생님, 다시 일해볼 생각 있어요?"
독서지도사와 디베이트 수업을 강의했던 강사님이 내게 물었다. 곁을 잘 내주지 않아 주부 수강생들에게 서운함을 안겼던 강사님의 질문이었기에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내심 기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찮게 강사님과 함께 일하는 초보강사들의 모임자리에 동석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경력단절로 전업주부가 되었다는 공통점 외에 참석한 3명의 초보강사들은 나와는 너무 먼 스펙과 이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당연해 보이는 것들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나는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애들이 아직 어려서요....."
강사님께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셋째를 낳고부터 퀴니 유모차는 내게 자동차였다. 둘째와 셋째를 한 번에 태우고 아이들 가방, 장바구니를 모두 실으며 좁은 골목도 다닐 수 있고, 주차 제약도 없는 내구성도 꽤 튼튼한 자동차였다.
그런데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퀴니 유모차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다. 5살이 된 셋째는 유모차에 태우기에 몸이 커져버렸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 곳도 좁은 우리 동네를 벗어났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던 운전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누구의 등 떠밀림 없이 처음으로 일을 벌였다. 도로주행을 신청하고 바로 경차를 주문했다. 죽기 살기로 매일같이 나는 운전대를 잡았다. 마주오는 차만 봐도 내게 달려드는 것만 같던 두려움이 두어 달 지나면서 사라져 갔다. 일자 주차에 오십 번도 넘게 들락날락하던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으로 운전이 어느샌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6개월쯤 지났을까? 독서모임 언니들은 나를 믿고 서울에 있는 미술관을 가자며 눈을 반짝였다. 동네 운전 맛에 재미는 있었지만 막상 좁은 동네를 벗어난다니 덜컥 겁부터 들었다. 죽기 살기로 했던 처음처럼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는 날짜를 잡았다.
밤잠까지 설치며 미리 경로를 찾아봤다고 고백하자, 자신들을 태워갈 못 미더운 운전기사를 일행들은 한마음으로 응원해주었다. 한 명의 운전기사와 3명의 네비 탐색자를 태운 경차는 미술관으로 출발했다.
“어, 거기 아닌데…….”
“괜찮아. 다시 돌아.”
“오늘 안에만 가면 되지머.”
제때 길을 찾지 못해 여려 대교를 건넜지만 내 차는 처음 목적지였던 현대미술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돌고 돌아 찾아간 미술관에서 작품의 해석과 의미는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는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었다.
감상하며 내가 보고 느낀 것으로 그 작품은 이미 내 것이 될 수 있음을 나는 그렇게 배울 수 있었다.
15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다시 그때 그 강사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때 못했던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