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레나의 마음숲 Oct 15. 2021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난 나 같이 살면 돼.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왜 다른 사람 흉내를 내냐"

몇 년 전, 카랑카랑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게 누군가를 응원해 주는 어른의 목소리를 들었다.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 나는 배고파서 연기했는데 남들은 극찬하더라고..... 그래서 예술은 잔인한 거야."

그 어른은 몇 년 뒤 한국인 최초, 아시아에선 64년 만에 두 번째라는 오스카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받았다.




대기업을 다니던 남편이 근속 20년을 1년 앞둔 3년 전, 사표를 냈다. 그룹사 전체 30명만 뽑아 듣게 한다는 MBA 1년 과정을 마쳤고, 1년 뒤면 임원 진급 대상자이자 예정자에 가까웠음에도 남편은 사표를 냈다.



"나 행복하지가 않다."



매달 자신에게 주어진 목표를 채우고 그 목표를 이루어내고, 다시 다음 달 목표를 받던 어느 날, 6개월 연속 매출 1등 부서의 잘 나가는 이 팀장은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의 김보통 씨가 되어 아내인 내게 자신의 불행을 고백했다.


김보통 씨에겐 없던 아내와 세 아이들, 살아계신 부모님이 있는 내 남편 이 팀장은 그럼에도 쉽게 김보통 씨와 같은 선택을 할 순 없었다.

매달 들어오는 적지 않은 월급,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들, 대기업 다니는 둘째 아들이 버팀목이자 비빌 언덕인 부모님을 가진 이 팀장의 어느 날 불행 고백은 전업주부로 10년을 버텨온 내겐 큰 충격이자 동시에 미안함이었다.

눈을 감으면 엄습해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매일 밤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 소리에 의지해 까무룩 잠으로 그 밤을 버텨내는 이 팀장에게 아내인 내가 해줄 수 있는 위로는 쉬는 날 좋아하는 영화를 실컷 보게 만들어주는 것뿐이었다.

다른 팀장들이 골프를 치며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인맥을 늘려가는 동안 우리 집 이 팀장은 온라인 세상에서 또 다른 이름으로 세상을 배우고 양방향이 아닌 한 방향의 친분을 늘려갔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버텨낸 3년의 시간이 흘렀다.

퇴근길이면 내게 전화로 하루 일과를 털어내던 이 팀장, 그러니까 남편은 그날도 여느 날처럼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더 미루면 진짜 못 할 거 같아. 더 늦기 전에 해볼게."


올 것이 왔구나,

조직을 떠나 혼자 독립해 보겠다고 결심한 남편의 퇴사 결심을 나는 말리지 못했다. 아니 말릴 수 없었다.


'그래. 그렇게 해. 난 당신 믿어.'


믿고 싶었고 믿어야만 했던 이 말은 남편보다 내게 더 필요한 말이었다.




"퇴사를 안 말렸다고?"


뒤늦게 아신 시어머니의 탄식 같은 원망을 들으며 나는 남편의 대변자가 되었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성장하는 시간만큼 나 역시 남편에게 그런 시간을 줄 수 있기를, 꿈같은 이상향을 바랐다. 그래서 더욱 적극적인 대변자 노릇을 자처했고 시어머니의 원망은 아들이 아닌 말리지 않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때껏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미래에 빨간불이 켜졌다고 생각한 첫째는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이번에도 나는 남편의 대변자가 되어 희망과 용기의 말들을 담아내며 아이를 다독였다. 그 말 또한 아이보다 나에게 더 필요한 말들이었다.


누군가의 원망과, 누군가의 눈물과, 누군가의 희망과 용기를 담아낸 한 가장의 퇴사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나저나 자네, 회사 좋은데 다니지 않았나? 왜 그만뒀지?"

교수님이 물었다.

"그...... 심적으로 너무 힘들기도 하고....."

"실수한 것 같아. 왜 굳이 길이 아닌 길을......"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중에서)




'말렸어야지.....'


남편이 준비했던 첫 번째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주변의 불안과 걱정의 말들은 내게도 비수처럼 꽂혀왔다.

그럴수록 그 말에 보란 듯이 그들의 불안과 걱정이 틀렸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꼭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었다.

남편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채 펴보지도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깜깜한 방문 틈으로 들어오는 빛 한줄기에 의지하듯 그 시간을 견디고 버텨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보이지 않던 3년 전 10월은 우리에겐 아팠고 힘겨웠다.




김보통이 된 남편과 맞는 세 번째 10월, 남편이 말했다.

당장 싫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지금, 더 이상 불행하지 않다고.....

여전히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지만 그때 용기를 내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세상의 여러 길 중 하나밖에 몰랐던 그때보다 고돼도 여러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지금껏 가보지 않은 길 위에서 네비 속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불행에서 더 멀리 도망치기 위해 네비 속 그녀가 말해주는 재탐색의 길 위를 오늘도 김보통 씨와 나는 달리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완벽주의라는 사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