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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나의 마음숲 Nov 29. 2021

주말 김장

칠순 엄마의 소원

"11월 둘째 주 토요일에 김장할 건데 시간 괜찮지?"

"그 주에 나 좀 바쁜데....."

"주말 김장 차지하는 데 몇 년 걸렸어. 못 바꾼다. 시간 맞춰서 꼭 와."​


엄마에게 주말 김장은 오랜 꿈이었다.



엄마가 새댁이었던 시절부터 칠순이 된 올해까지 작은 시골 동네에서의 김장 품앗이는 근 오십 년의 세월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왔다.

엄마에게 김장은 11월이고, 11월은 김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반 백 년의 시간, 새댁은 칠순의 노모가 되었다.

반 백 년의 세월 동안 김장 품앗이를 해왔음에도 엄마는 당신이 원하는 날짜에, 자식들이 가능한 날짜에 김장 차례를 맡아본 적이 없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다 김장을 마친 제일 마지막 차례나 혹은 다른 할머니들의 사정으로 취소가 된 날짜에나 당신의 차례를 잡아 날짜 통보 전화를 알리는 엄마가 안쓰럽다 못해 나는 답답했다.​


"올해부터는 주말에 김장할 수 있어! 그러니까 다 와라. 알았지?"​


작년 11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업된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 엄마가 김장을 한다고?

기 세고, 말 많고, 목소리 큰 할머니들 틈에서 목소리 크면 져주고, 말 많으면 입을 닫는 소극적 할매가 주말 김장을 맡았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고!

"순덕이 엄마가 췌장암으로 입원했어. 그 할망구가 매년 주말에 했는데 그 시간이 비었지 뭐야. 그래서 잽싸게 내가 한다고 했지. 이제 일요일은 내 차지야!"

단 한 번도 주말 김장을 양보하지 않던 기센 대장 할머니,

 대장 할머니의 췌장암 투병이라는 슬프고도 애절한 사연은 여태껏 허락되지 않던 엄마의 주말 김장을 차지하게  배경이 되어 주고 말았다.





20년 전 재수학원의 장학생으로 1년의 재수를 선택했던 남동생이 수능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고 K대 법학과에 합격했다.

그 일은 작은 시골 동네가 들썩일 만큼 큰 경사 중 하나였다.

엄마는 그 큰 경사에 동네 어른들이 바라는 잔치는커녕 플래카드 하나 붙이는 것마저도 만류하셨다. 8년 후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일로 엄마는 동네 어른들에게 인색하다는 오해를 샀다.

엄마를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그 일에는 엄마의 오랜 속앓이가 숨겨져 있었다.​


"니 아부지가 술만 아니면 점잖은데...... 그놈의 술이, 술이 왠수잖냐."


평소 말 없기로, 점잖기로 유명한 아버지는 술이라는 왠수(?)를 만나면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놓은 당신의 한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아버지의 주사는 엄마에겐 인색함을 이기는 더 큰 두려움이었다.



나눠주고, 퍼주는 거 좋아하는 엄마가 인색한 사람으로 오인받아야 했던 그 두 번의 사건(?)은 2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못다 푼 한처럼 엄마의 마음 안에 남아있었다.



마흔 직전의 남동생을 구원해준 복덩이 올케가 작년부터 준비하는 김장 품앗이 점심상에는 그런 엄마의 한을 풀어내려는 며느리 마음이 녹아져 있다.



큰딸, 작은딸, 큰아들, 사돈댁, 동서네, 몇 년  떠난 시누의 딸까지.....

엄마의 마음을 담은 120포기 김장은 꾹꾹 눌러 담은 집집마다의 김치통에 담겼다. ​

주말 김장을 마친 엄마의 웃음소리는 방문을 넘고, 거실을 넘어 대문 밖에 서까지도 들릴만큼 크고 화통하게 친정집 마당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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