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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나의 마음숲 Jan 13. 2022

소년에게 쓰는 편지

48년생 아빠에게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경운기 뒷자리에 두꺼운 밍크 이불이 반으로 접힌 채 깔려 있었다. 꽉 잡으라는 아빠의 당부를 들으며 나와 동생들이 경운기에 올라탔다. 막내까지 올라탄 것을 확인한 아빠가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탈~~ 탈~~ 탈 탈탈 탈탈 탈'

요란스러운 시동 소리와 함께 회색빛 연기가 경운기 엔진 위로 피어올랐다.


시동이 걸리자마자 시작된 경운기 바운스에 나와 동생들의 엉덩이는 제멋대로 들썩거렸다. 아빠가 운전하는 경운기는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30분 넘게 달렸다.


새해 첫날 아침이었다.



방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만난 지린내가 코밑을 쿡 찌르듯 밀려왔다. 막 이불을 정리하는 당숙 아저씨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그 옆에 헝클어진 백발의 커트 머리 할머니는 초점 없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당숙 아저씨가 챙겨 입힌 진갈색의 두꺼운 카디건 안으로 빨간 내복이 보였다.​


"고모, 동기 왔어요. 세배받으세요."

고모할머니 코앞까지 다가간 아빠가 큰 목소리로 소리 지르듯 말했다.


쭈뼛거리며 서있는 우리를 한 줄로 세워놓은 아빠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 시작 신호를 주었다.


아빠의 신호에 맞춰 나와 동생들은 어색한 세배를 시작했다.​


"고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모할머니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우리의 세배를 받고 있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당신의 7남매와 함께 아빠를 키워준 큰고모.

아빠에게 큰고모는 엄마였고 동시에 아버지였다.




거나하게 취한 밤이면 아빠는 큰고모네 집에서 자라던 당신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두서없이 되풀이하곤 했다.


7남매와 함께 했던 모내기, 7남매와 함께 했던 참외 서리, 7남매와 함께 했던 가을걷이, 7남매와 함께 했던 배고픈 겨울......


얹혀 지내는 당신의 조카가 행여라도 눈치 볼까 싶어 큰고모는 7남매 틈에 조카를 끼워 넣고 같은 일과 같은 마음을 주었다.


아빠는 그렇게 큰고모의 7남매가 아닌 8남매가 되어 그 집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내가 80명 중에 그래도 10등 안에는 들었었거든......"

중학교에 가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은 이 말들로 거나해진 밤을 채웠다.

큰고모가 쌈짓돈을 털어 보내준 서당 3년.

중학교 대신이었다.  

아빠에게 그 배움은 국졸이 최종 학력이었음에도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자부심이었다. 작은 시골 동네에 아빠만큼 한자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당신의 눈에 가장 부러웠던 이는 고등학교를 나온 국민학교 동창이었고, 형제가 많은 당신의 사촌들이었다.  

외로운 소년은 의심할 필요 없는 든든한 내 편을 갖고 싶었다.

슬하에 4남매를 두었고, 외로운 소년에게 4남매는 벅찬 기쁨이었고 때론 버거움이었다.

그래서 마흔여섯의 아빠와 함께 살고 있던 소년은 자주 거나해졌다.





일흔넷이 된 아빠의 생신날.


4남매는 유년 시절 함께한 모내기와 고추 따기와 볏단을 뒤집으며 그 시절의 그 시간을 마르지 않는 샘물로 되풀이했다.

외로웠던 소년이 이룬 꿈.

아빠의 4남매는 평생 의심할 필요 없는 든든한 내 편을 가졌다.​


마흔여섯의 딸은 일흔넷과 살고 있는 소년에게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말을 적어본다.

든든한 내 편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더는 외롭지도 미안해하지도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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