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선생 Aug 06. 2023

시크함은 다음 생애에

구선생의 파격(?) 변신기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짧은 커트머리라서 머리가 금방 자라고 지저분해지기 때문에

최소 한 달에 한 번씩은 미용실에 가서 다듬어줘야 한다.

갓 다듬어 가볍고 산뜻한 머리가 어느 순간부터 답답하고 덥수룩하게 느껴진다면

자른 지 최소 3주는 지났다는 신호다.

미용실에 가는 것은 언제나 몹시 귀찮은 일이지만

자르지 않고 두면 앞머리가 눈을 가려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미용실을 예약해서 머리를 다듬어준다. 



2년 정도 같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냥 단정하고 얌전해 보이는 생 커트머리.

미용사가 여러 번 파마를 권했지만

염색약으로 떡칠한 올백 머리를 하고 배에는 거대한 쿠션을 낀 채

파마 종료를 알리는 기계음이 들릴 때까지 하염없이 거울 속의 나를 대면하는

일련의 과정이 내게는 큰 고역이었기 때문에

‘아 네ㅎㅎ’ 하면서 애매하게 웃는 것으로 거절을 대신하곤 했다. 



익숙했던 머리가 지겨워지기 시작한 건 몇 달 전부터였다.

생 커트머리는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했지만

전혀 가공을 가하지 않은 머리이기 때문에

꾸미거나 신경 좀 썼을 때 나는 깔쌈한 맛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냥 공부 열심히 하는 단정한 동네 학생 같이 보였다.

그리고 나중에 더 자세히 밝히겠지만 나는 갈 데 없는 모범생처럼 생겼으면서도

모범생으로 보이는 것을 몹시 지겨워한다.



어쨌든 공부를 열심히 하게 생긴 것이 지겨웠던 나는

새 헤어스타일을 시도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덜 성실해 보이고자 했다.

사실 전부터 봐둔 스타일이 있기는 했다. BTS 정국의 장발 헤어다.

앞머리에 파마를 넣고 뒷머리는 짧게 자른 스타일인데,

이 정도 스타일을 한다면 나도 좀 꾸민 티가 나고

조금이라도 날라리 같아 보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고

정국의 사진을 갤러리에 조심스레 저장했다.

이제 남은 것은 용기를 짜내어 그 사진을 미용사에게 보여주는 것뿐.

생각만 해도 수치스럽고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어쩌겠나.

버섯머리 범생이로 계속 살지 않으려면 눈 딱 감고 보여주는 수밖에.



드디어 결전의 날이 되었다.

미용사에게 정국 사진을 보여줄 생각에 오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나는

출격하는 장군의 각오로 미용실에 입성했다.

머리를 감은 뒤 의자에 앉은 나에게 미용사는

어김없이 ‘지난번처럼 잘라드릴까요?’라고 물었고,

나는 ‘아, 아뇨. 이번에는 좀 다르게 해보고 싶은데…’라고 대답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따로 하고 싶은 스타일 있으세요?”

“아, 네. 이번에는 옆머리랑 뒷머리를 짧게 치고 앞머리는 길게 하고 싶어요. 가르마도 좀 넣고…”

“앞머리에 가르마를 넣는다는 게 무슨 뜻이실까요?”

“아, 그러니까… 앞머리를 다 넘기는 게 아니라 중간에 가르마를 넣어서… 웅얼웅얼…”

“혹시 따로 사진 같은 거 없으실까요?”

“아… (올 게 왔구나.) 잠시만요… (주섬주섬)”



나는 갤러리를 열어 정국의 사진을 찾은 뒤 눈을 질끈 감고 미용사에게 내밀었고,

다행히 미용사는 ‘손님, 이건 정국이에요’라고 하는 대신

‘아~ 이런 스타일 원하시는구나~’하며

이 스타일을 하려면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일단 지금 앞머리는 좀 더 길러야 하고, 앞머리 파마도 해야 한단다.

정국 사진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있던 나는

미용사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뒤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미용사의 손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안경을 벗은 채로 거울을 응시하며 또 다른 불안감에 빠졌다.

두더지 수준의 시력을 가진 나에게는 거울 속 내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용이 끝난 뒤에 안경을 써야만 비로소 나의 변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교적 큰 변신이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더 불안했다.

나대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버섯머리나 할걸…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지만

멋져지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버텨냈다. 



“자, 다 됐습니다~”



미용사의 말에 부랴부랴 안경을 쓴 나는

거울 속의 웬 선량해 보이는 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자는 분명 요즘 유행하는 힙한 앞머리펌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성수동이나 힙지로가 아닌 동네 도서관에 주로 서식할 것 같이 보였다.

동그란 눈과 동그란 코, 동그란 얼굴형과 통통한 볼살이

동그란 안경테와 동그랗게 말린 앞머리와 함께 엄청난 동그라미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또 실패인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커트값과 파마값을 합친 비용을 지불한 뒤 터덜터덜 미용실을 나섰다.



변신한 내 모습을 믿을 수 없어

미용실 건물 아래층에 있는 전신 거울에도 다시 한 번 비춰봤지만 결과는 그대로였다.



그랬다.

힙한 것은 헤어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예전에 대학원 다닐 때 맘 먹고 파격 변신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그냥 투블럭에 금발 염색한 선량한 모범생으로 보여서

힙에 대한 욕구를 거의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꽤나 보수적인 편이신 통번역대학원 교수님들도

내 머리를 보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걸로 봐서

내가 원하는 반항적이고 위험한 이미지가 전혀 전달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집에 터덜터덜 돌아온 나를 본 엄마의 첫 마디.

“이번에도 귀엽게 잘라줬네~”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엄마, 내가 의도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난 정국처럼 반항적이고 시크한 분위기를 풍기고 싶단 말이야!!

적어도 독서실 정기 이용권 끊은 범생이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다고!!!



나는 일말의 헛된 희망을 품고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엄마, 나 이번에 앞머리 펌했는데 좀 시크해 보이지 않아?”

하지만 돌아온 엄마의 야속한 대답.

“아니, 그냥 귀여운데.”

슬픔과 절망에 빠진 나는 조용히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옆에서 관전하던 아빠는 ‘이게 다 아빠가 귀여운 탓이야. 미안해.’하고 속삭였다. 



아무래도 시크함은 다음 생애에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사진은 예전 머리와 흡사한 비틀즈컷.

사진 출처: ¿Qué miembro de los Beatles eres? (pinterest.co.kr)

매거진의 이전글 지하철 광인소나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