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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Nov 01. 2020

엄마에게도 헝가리 집이 생겼다.

부다페스트 이야기


엄마를 배웅하고 오는 길이다.


인천으로 바로 향하는 폴란드 항공 '직항'이 오늘로 (우선은 한 달간) 마지막이란다.  9월 1일부터 다시 외국인 입국 금지령이 내렸다.


그렇게 맑고 화창하더니, 오늘은 왜 이리 날씨도 꾸중한 지.. 

예전이었으면 신파 찍고도 남을 날인데, 오늘은 쏘쿨하게 보내드리고 왔다.


5년 전, 헝가리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엄마한테 한국에 있는 짐 싸들고, 이곳에 와달라고 요청했었다.

단순 짐뿐만 아니라 이곳에 와서 내가 왜 이 나라와 사랑에 빠졌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짚신도 제 짝이 있다 했지, 헝가리는 내 짝이었지. 엄마 짝은 아니었다.

물론 이 나라 참 좋은 나라라는 엄마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그렇게 애지중지 하던 딸이 뜬금없이 헝가리에 살겠다고 짐 싸들고 떠나더니 돌아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만세를 부를 엄마가 과연 어디 있을까. 

여행을 보낸 딸과 아예 떠나 살겠다고 떨어져 있는 딸은 천지 차이다.

5년 전, 잠시 머물던 집에서 잠들기 전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엄마가 높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여긴 천장이 왜 이리 높니, 네가 내 옆에 있는데도 이렇게 맘이 휑한데, 너 혼자 있을 땐, 얼마나 외롭고 막막할까" 

"엄마, 나 괜찮아. 내가 좋아서 있겠다고 한 건데.. 난 헝가리식 집이 운치도 있고, 이국적이고 좋은데?"라고 대답은 했지만, 엄마가 말한 이상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를 생각하며 아찔하고도 머리 새햐얘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차라 속에서 차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혼날 뻔했었다. 

엄마가 옆에 없었다면 아닌 척 꾹꾹 누르고 눈치 못 챌 남모를 서러움이었다.

그 당시, 일주일간 헝가리에 머물렀던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배웅하고 오던 길에 누가 보든 말든 공항에서 부다페스트 시내로 들어올 때까지 정처 없이 울며 떠돌아다니던 때가 지금도 생생해서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의 나 자신에게 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안아주고 오고 싶다.

엄마한테 지금도, 그때도 감사한 건, 마음 아파만 하셨지, 내 의견에 한 번도 '안 된다'라는 본인의 생각을 주장 하시진 않았다는 점.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힘이자 무언의 응원이었다.

언제나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시고, '내 딸은 어딜 내놔도 걱정 없다'라고 백 프로 믿어주는 그 믿음이 얼마나 감사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한지. (나한테 딸이 있다면 난 그러지 못했을 듯)







유치원 때부터 우리 엄만 (부득이한 경우를 빼놓고) 한 번도 새벽기도를 거르신 적이 없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늘 기도하고, 성경 읽고, 어떤 때든 감사를 고백하던 그런 분이었다. (감사가 습관이었던 엄마, 친구 같았던 다정함이 유일하게 엄격함으로 변하던 때는 단 두 경우에만 해당됐다. '예배를 빠질 때'와 '불평불만을 입 밖에 내뱉었을 때' 그때뿐이었다. 그래서 나한텐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 있다. 나쁜 말을 하면 바로 반성하는 말을 동시에 하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허락되어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던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기도와 감사'로 삶에서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었던 엄마. 나에겐 언제나 '엄마의 기도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든든함과 자부심이 있었다. 그 어떤 부자 엄마, 명망 있는 엄마보다 가장 멋진 분이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살아온 나는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가! 늘 생각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온 나에겐 사실 두려움이나 고난, 고통 같은 순간을 결국 감사의 고백으로 흘러 내보내는 '엄마의 모습' 같은 것이 의식적으로 배어있다. (그 과정 속에선 죽을 만큼 힘들지만) 일종의 삶 속에서 체화된 습관 같은 것이다. 그게 지금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엄마, 고마워요)

이번 3주간(2020.08.10-2020.08.31)의 여정은 지나 온 우리 가족과 나의 발자취를 더듬기에 충분히 충만한 시간이었다.






한국이 제2의 코로나로 들썩이기 전에 "엄마! 헝가리에서 한국인은 녹색국가로 분류되어서 자가격리 면제래! 그냥 잠시 쉬어간다 생각하고 올 테야?"라고 전화를 걸었었다. 그 던졌던 한 마디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이번에 이런 시간을 누리게 된 것이다. 마지막 직항을 타고 들어가는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헝가리에서만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가겠다 했던 것이 

마침 이곳에 오래 사신 분의 제안으로 '오스트리아' 여행을 다녀오게 되고, 

친구의 도움으로 헝가리 지방 도시들을 방문하고,

이곳에서 귀한 만남의 시간들도 가지고..   

코로나로, 장마로,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인도에 계신 아빠에 대한 걱정으로 상반기를 속 태웠던 엄마에게

매우 햇살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실제로 헝가리의 푸른 하늘과 건조한 날씨를 매일 같이 '행복해하시며' 방긋방긋 웃던 엄마였다.

여긴 날도 맑고, 한국 뉴스를 멀리하게(한국에서는 매일 코로나와 장마, 홍수 뉴스로 매몰되어 있었는데)되니, 헝가리에선 위협적인 뉴스를 한국처럼 많이 다루지 않기에 - 체감적으로 평온한 장소에서 선물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 셈이다.





엄마와 3주 중, 나흘을 제외하고는 밤마다 산책을 했다. "넌 왜 이렇게 나를 가만 두지 못해 안달이니? 엄마 좀 쉬자!"하고 말하면,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방에서 뒹굴거려.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얼마나 엄마랑 하고 싶은 게 많은데!" 

"내가 이팔청춘인 줄 아나 봐, 얘는"하고 결국 나갈 채비를 갖추는 귀엽고 소녀 같은 엄마 : )

함께 걸으며 이젠 서로 헤어짐에 서글프지 않을 것 같단 말을 다짐하듯 주고받았다.

"그땐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지금은 그때처럼 슬프지 않을 거 같아"이런 식의 대화였다.


그런데 얼마 전 국경이 다시 차단된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지막이 건네던 말. "같이 들어가자, 한국. 딸내미..." 

"됐거든?"하고 다른 말로 화제를 전환했지만,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끝까지 차올라 왔음을 그녀는 눈치챘을까.

5년 전, 그때도 '가지 마, 딸'하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던 엄마였을까.. 하는 생각이 오버랩됐다.

'지금 이 슬픔은 일시적인 것이다. 곧 지나간다. 되뇌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래야만 했다.

갑자기 전 세계에 확진자는 늘어난다 하지, 미리부터 올 가을, 제2의 코로나가 확산된다 하지.. 직항이 곧 끊기지.. 

멘털 관리에 좋지 않은 소식들로 인해 잠시 혼동됐던 것이야! 엄마와의 헤어짐과 코로나 고립? 사이에서. 그렇게 마음을 다 잡으며 그 순간을 모면했다.


"우리 딸 덕분에 이런 좋은 곳에서 멋진 시간도 보내고.. 작년에 내가 왔을 때, 바로 직후에 '배 사고'가 났고, 올해는 코로나로.. 그렇게 마음이 무거울 수 없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에게 기도를 시키시네. 그럼에도 또 감사의 고백을 하게 하시네, 이 지치고 곤한 마음을 '헝가리에서의 시간 속에서' 위로해주셨어,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이 힘으로 한국에서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나누어 줄 수 있을 거 같아. 그렇게 하라고 이리로 날 보내셨나 봐, 하나님은"

"맞아, 엄마. 재충전했으니, 이젠 그 힘을 전파해야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 없잖아. 다 함께 하라고 하셨는 걸!"




엄마랑 산책을 다니며 도시 구석구석을 파헤쳤다. 여행 코드가 매우 잘 맞는 모녀이다. 우린,

부다페스트에 처음 왔을 때, '이 도시 중 유독 이국적으로' 느껴졌던, 씰깔만 광장(Szeéll Kálmán tér, 구 모스크바 광장). 

내 첫 마음이 그리워질 즈음에 자주 찾는 곳이다. 

나랑 성향이 비슷한 엄마는 트램으로 오고 가며 이 장소를 지날 때, "어? 여긴 느낌이 또 다르네? 한 번 걸어보고 싶다"라고 얘길 해서, '역시 우리 엄마구나.. 나랑 보는 눈이 똑같네, 날 잡아 같이 걸어야지..'하고 작정했던 광장 -  이곳에  내가 즐겨 찾는 카페에서 플랫 화이트와 '밀푀유(페이스트리 켜켜이 다양한 필링을 채워 만든 프랑스의 디저트)'를 먹고 엄마와 운동 겸 집까지 걸어가기로 하던 차였다. 



"어? 새로운 공원이다! 한 번 들어가 보자! 엄마, 아직도 내가 모르는 부다페스트가 많네. 엄마가 온 덕분에 나도 좋은 구경 많이 한다. 나오길 잘했지?" 

"응, 그렇네!"



언젠가 여행이 다시 자유로워지는 때가 온다면 '꼭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부다페스트 속 '진정 부다페스트(헝가리인들이 여가를 보내는 법에 대한 정석)'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헝가리 답지 않은(?) 최신식 공원의 매력에 풍덩 빠질 것이다. 파리 '튈르리 공원'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안 그래도 부다페스트는 '동유럽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 더 보태는 별칭이 생기겠네.



'Millenáris Park'




'Millenáris Park'


일상 속 망중한을 즐기는 '헝가리인들' - 코로나가 비껴간 듯한 부다페스트 풍경




헝가리에서 흔한 일상 풍경







"날이 어둑해지기 전, 좀 더 움직이자, 어부의 요새로 올라가 볼까?"

"얘 좀 봐, 엄마가 새파란 젊은이인 줄 아냐?"하고 다시 따라나서는 김 여사 : ) 



머르깃 다리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카누를 즐기는 이들.





▼ 

"어부의 요새'는 내 첫 헝가리 인상에 강력하게 쐐기를 박은 장소이다. '이곳에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심어준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살아 쉰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라 확신했다. (확신은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것이지만 그땐 그랬다)

이곳에 서서 난 사진 대신 글을 썼다. '뭐 이런 멋진 곳이 다 있지?'그런 류의 내용이었다.

엄마와 이곳에서 이번 여행을 마무리 짓고 돌아보고 싶었다. 



나의 처음이 된 곳. 특별한 장소이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을 지닌 곳으로 알려진 '부다페스트'
어부의 요새


집으로 가는 길에 보름달이 떠있는 걸 발견했다.




2020. 8월의 마지막 날




"이 집을 나서는 것도 아쉽네, 작년이랑 올해, 편안한 쉼을 누렸던 곳이야. 엄마한테도 헝가리 나의 집이 있네, 네 덕에"

택시에서 내내 헝가리에서 좋았던 점을 줄줄이 나열하는 우리 엄마, 단비 같았던 이 시간들을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내에서 기록하겠노라고 갔었던 장소들을 적어달란다.



누가 우리 엄마 아니랄까 봐. 감성 충만한 아줌마라서,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참 감사해요.



"엄마, 곧 또 만나자. 나 잘하고 있을게.
씩씩하게 건강 잘 챙기면서. 엄마 걱정 안 시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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