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대간 산행이 끝났다.
'마침내'라는 표현은 아쉬움, 섭섭함 보다 후련함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3년간의 대장정을 마쳤음에도 그로 인한 성숙함은 딱히 없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라 생각했던 산행이라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3년의 끝을 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싶다. 그동안 대간을 걸으며 뭘 느끼고, 배울 수 있었을까?
산행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도 아니다. 집안의 경조사가 있었다면 산행보다 행사를 우선시했을 것이다. 주말마다 산행에, 다른 일로 부재중일 수밖에 없었다. 늘 가족에게 미안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도 힘든 대간산행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학창시절 우등상은 받지 못했어도 개근상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칭찬해 주고 싶은 건 폭설과 폭우, 악천 우 속에서도 산행을 계속했던 자신의 우직함이었다. 종주를 마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홀가분하다.
미시령 중턱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이었다. 국립공원 단속반을 피하기 위해 미시령 중턱에서 대간버스는 멈춰섰다. 마지막 구간마저 통제구간으로 인해 도둑 발자국을 한다는 건 여간 짜증 나는 일이 아니다. 90년 초 갑자기 내린 폭설로 체인을 준비하지 못한 봉고차는 운전석에 앉은 대학 선배 한 명을 남기고 미시령 고개까지 차를 밀고 올라가야 했다. 화천부대에 근무하는 장교 한 명과 사병 두 명을 속초시내에서 태웠는데, 그들도 우리 봉고차를 밀지 않고서는 미시령을 넘을 수 없었다. 히치하이킹으로 미시령을 넘으려고 했던 그들이었지만 폭설에는 여지없었다.
길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암릉 너덜지대로 이어졌고 좀처럼 표시판을 찾을 수 없었다. 정식 산행코스가 아닌 통제구역을 비켜가는 길이라 조심조심 철책을 넘었다. 꼭 전투하러 가는 기분이다. 별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 속초시내의 야경은 반짝반짝 아름답기만 하다. 가파른 언덕 바람은 태극기 보다 더 강하게 펄럭거렸고 몸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새벽이슬을 맞은 나뭇잎들은 잎 안쪽에도 이슬이 젖어 눈꽃이 앉아있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한 여름에도 눈꽃을 볼 수 있다니……
흐린 날씨로 동트는 것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안갯속에서 허둥대던 해는 바람에 밀리고 밀려 커다란 연이 날듯 하늘 높이 올라서 있었고, 안개는 신선이 모여 사는 듯 뭉클뭉클 하얀 구름이 산 허리를 휘감았다. 대간의 마지막 코스를 걷는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길은 사람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노신은 말했다. 대간 길도 사람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지리산부터 진부령까지 990여km를 걸었던 것이다.
병풍바위까지는 가도 가도 끝없는 오르막이 이어졌다. 표시판이 없는 구간이라 혹시 마산 봉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덜컥 마산 봉으로 가는 표시판이 나왔다. 알프스 리조트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이 계속되었고, 그 길은 알프스 스키장 리프트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다. 알프스 리조트는 스위스 풍의 시계탑 바늘이 멈추면서 퇴락하기 시작한 듯하다. 사방으로 중단된 공사흔적이 가득하다. 젊은 날 '강한 여자는 수채화처럼 산다.'는 어느 여류화가의 수필집을 통해 알프스 산장과 흘리마을을 그리워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군부대마저 철수해서 거대한 기계가 멈춰 서버린 흑성탈출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육장에 묶인 개들은 알 수 없는 울부짖음을 쉬지 않고 토해내고 있었다.
진부령까지 내쳐 걸어 16km 마지막 구간 산행은 끝이 났다. 지리산 종주만을 생각하고 출발했던 구간이 횟수를 더 하다 보니 욕심과 의욕이 더 해져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큰일을 끝내고 나면 이제 무슨 목표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우리네 인생처럼 이제 대간 산행을 끝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멍해지기도 할 것이다.
산행을 통해 뭘 느끼고 배웠냐고 애써 말하고 싶지 않다. 가슴속에 대간이 살아 움직이면 그만이다.
대간이 숨 쉴 때 내 가슴도 같은 호흡을 했다. 비가, 눈이 내릴 때 늘 그곳에 있었다. 이렇게 오래도록 꾸준히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적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산행 내내 성실했던 것도 아닌데, 종주가 끝나고 나니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이제 통일이 되어야 대간산행을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열망이 망향인 같기야 하겠으나 이제 '나의 소원도 통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같이 산행했던 분들이 한 분 한 분 생각난다. 참으로 소중하고 의미로운 분들이다. 산행을 통해 눈물 나도록 정이 많이 들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