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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라 Mar 18. 2024

차라리 사랑할 것

[고기보다 채소가 더 많은 백숙]

예전에 살던 집은 시내 한복판,

대단지 아파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벽마다 닭이 울었다.


어디 먼데서부터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게 아닌, 집 근처 어딘가에서 우는 거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우리 아파트 양 옆으로는 또 다른 대단지 아파트가 있었고, 길 건너에는 중형 마트와 파리 바게트, 300평이 넘는 헬스장 등이 있는 상가 건물이 나란히 있을 뿐, 닭장이 있을만한 데가 없었다. 한 번씩 동네를 걷다가 단독주택이 보이면 마당 안을 흘낏 살펴보기도 했으나 닭이 보이진 않았다. (단독주택이 많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이 동네 닭이 아닌 듯했다. 좀 멀리 사는데 유별나게 목청이 커 여기까지 울려 퍼지는 게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당시에 나는 닭 우는 소리에 새벽부터 깨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내게만 잘 들리는 듯 했다. 남편에게 닭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소연해도 이 동네에 닭이 있냐고 놀라워할 뿐, 그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으니까. 아이들 또한 닭 우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고 했다. 내가 밤귀가 지나치게 밝은 것일까. 아, 아무리 불면을 호소해 봐도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닭이 몇 가지 좀 특이한 데가 있었다. 먼저 꼬끼오, 하고 울지 않았다. 쿼에에에엑, 하고 울었다. 그것도 꽤 길게. 뭐랄까, 먹으면 절대 안 되는 무언가 무심코 집어삼켜 놀란 마음에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토해내려는 소리 같다고 해야 하나. 옆에 있으면 누구라도 등짝을 탁, 쳐줄 수밖에 없을 거 같은 그런 소리였다. 두 번째, 결코 해가 뜰 때 울지 않았다. 동 트기 한 시간 정도 전, 이제 막 어스레해질 적에 울어젖혔다. 온 힘을 다해 쿼에에에엑! 이제와 생각해 보니 지구상 그 어떤 닭보다 자신이 가장 먼저 기민하게 빛을 알아차린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하여튼 새벽 세 시 반 닭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 버리면 컴컴한 창이 점점 환해지다가 전깃줄과 구름, 오가는 새들이 스르르 나타나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허탈해다가, 어느 날에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는 게 낫다는 것이다. 가만히 누워 스트레스 받는 거보다 무엇이라 찌뿌둥한 몸과 정신을 깨워 줄 진한 커피를 내려 마시며 책을 좀 읽거나 오늘 하루 해야 할 일과 이번 달의 목표 따위를 끼적거린 후 요리를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사실 그 전까지 아침은 대충 떼우는 식이었는데 이렇게 된 거, 본격적으로 잘 챙겨 먹어보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이웃해 사는 닭에 대해서 한참 늘어놓다가 닭요리를 얘기하자니 썩 내키지 않기는 한데, 어쨌든 새벽에 깨면서부터 나는 아침에 느긋하게 죽 만드는 것을 참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닭죽을! 복수심 때문은 아녔다. 사실 나는 닭고기의 비릿한 냄새가 거북해 닭요리 (갓 튀긴 치킨마저도)를 즐기지 않은 편인데, 닭죽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좋아해 자주 만들어 먹는다. 특히 기력이 통 없을 때. 때문에 내가 만드는 백숙은 보통의 것과 사뭇 다른 면이 있다. 백숙을 위한 백숙이 아닌, 닭죽을 위한 백숙이기 때문. 백숙은 물에다 닭과 마늘, 파, 생강 등을 넣고서 끓이는 게 일반적이지만, 나는 감자와 당근, 호박, 버섯, 무 등 남아도는 자투리 채소를 왕창 넣는다. 삶은 닭은 건져내 가족들 먹인 후 냄비에 흐물흐물 익은 채소와 육수로 죽을 만든다. 냄비에 불린 쌀이랑 푹 익은 채소 으깨 넣은 후, 닭 삶은 육수를 부어 끓이면 완성. 닭죽을 만들기 위해 따로 채소를 다질 필요가 없으니 편하다.  


대체로 저녁 식사로 닭을 삶아 먹고 다음 날 아침, 죽을 끓인다. 닭 우는 소리 들으며 커다란 주걱을 휘휘 내젓는 새벽. 닭이 미워 죽겠다가도, 고마워지기도 한다.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온 후에도 그니까 이른 새벽, 쩌렁 쩌렁 울어대는 그 소리를 이제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는데도 나는 종종 새벽에 눈이 번쩍 떠진다. 이제는 창밖의 명도만으로 시간을 가늠해 볼 수 있게 되어서, 5시 전인 거 같으면 좀 더 자보려 하고, 넘은 거 같으면 슬슬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결코 만들 수 없는 죽과 같은, 따뜻하고도 푸근한 음식을. 어디 사는 누군지 모르는, 아는 거라곤 닭이라는 사실 하나뿐인, 아니 실재하는지조차 때때로 의문스러웠던 그 닭 덕분이라면 덕분이겠다.


닭죽을 위한 백숙 간단 레시피

① 압력밥솥에 닭과 자투리 채소, 다시마, 소금 1T 넣는다.
② ①에 물을 자박하게 붓고서 삶는다.
(닭이 다 익으면 건져 먹은 후)
③ 다른 냄비에 불린 쌀과 푹 익은 채소를 으깨 넣고서 육수를 부어 죽 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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