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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승 Mar 25. 2024

네 엄마가 내 딸이야!

달래장 만들어 놓는 봄

땅 속에 꽃씨가

잠을 깨나 봐

들마다

언덕마다

파란 숨결 소리에

포시시

눈을 뜨는

예쁜 꽃망울

산을 넘고

간을 건너

봄 오는 소리


<봄 오는 소리>라는 동요의 일부다. 포시시 눈 뜬다니,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의성어를 만들어냈을까.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을 뿐, 정말로 꽃 필 때 그 소리 날 것만 같다.

포시시, 포시시.




나에게 봄 오는 소리라 하면 할머니 발자국 소리부터 떠오른다.


다세대 주택 4층이었던 우리 집. 누군가 계단을 밟고 올라오면 발자국 소리가 집 안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그런 집이었다. 특히 할머니 발자국 소리는 유독 크면서, 누구보다도 느리기 때문에 나는 단박에 할머니가 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할머니는 가까운 동네에 살아서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오기는 했으나 봄이면 더욱더 자주 드나들었다. 서울 한복판이지만 집 근처에 야트막한 산이 있어 쑥 캐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검은 봉지나 한약방 타포린 백 한가득 갓 캔 쑥과 시장에서 사 온 나물을 잔뜩 싸들고 왔다. 사실 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빈둥거리다 할머니 오는 소리가 들리면 자동반사적으로 좀 짜증이 났다. 보나 마나 나물 다듬는 것 도우라 할 거고, 마주 앉아 있는 내내 잔소리할 게 뻔했으니까. 그 자리가 부담스러워 나는 늘 숙제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 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 나와는 달리 동생은 착실하게 할머니를 도왔다. 신문지 위 산더미처럼 쌓인 나물들, 시들시들한 부분 떼내고 껍질을 벗기는 등의 지루하디 지루한 일들을 참 묵묵히도.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엄마를 닮은 동생은 참 예뻐하면서 아빠를 닮아 뺀질거리는 내게는 정을 덜 주었다. 또한,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것을 늘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본격 사춘기에 접어든 내가 엄마 속을 썩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수하게 된 할머니. 아마 주말이었을 것이다. 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 쿵, 쿵, 거칠게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였다.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올 때와는 사뭇 다른 빠른 발자국 소리에 내 심장도 따라서 쿵, 쿵, 울렸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방 안에 숨어 올 것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내 방문이 쾅, 하고 열렸다. 할머니가 회초리를 들고서 무서운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동네에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으니까 분명 아카시아의 나뭇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워낙에 말썽쟁이였어서 학교에서는 선도부 선생님에게,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적잖게 매를 맞았던 터라 할머니에게 혼나는 거 정도는 사실 그렇게까지 겁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더니 의자에 앉아 있던 나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바짝 다가가 거만한 태도로 짝다리를 짚고서 섰다. 그러자 할머니는 회초리로 내 발등을 탁, 내리치고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 너네 엄마가 내 딸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게 가히 놀랍다. 왜냐면 그때 나는 발등을 부여잡은 채 방바닥을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도무지 설명할 길 없는 그런 아픔이었다. 발가락 뼈가 아작아작 끊어지는 거 같았으니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발가락이 절로 오므라들 정도다. 나는 모두 다 죽도록 미웠다. 할머니를 말리지 않는 엄마도 밉고, 이게 다 아빠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빠가 제일 미웠다. 할머니의 모든 말과 행동은 사실 거실에 있는 아빠를 겨냥한 거였다. 엄마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서 왼쪽 다리가 불편했다. 그런 엄마가 변변치 않은 직업에 뺀질거리는 데다가 도박까지 일삼던 아빠를 대신해 가장 노릇은 물론, 살림까지 도맡아 했으니 할머니는 아빠가 오죽 못마땅했겠나. 그러나 어째서인지 할머니는 아빠에게 찍소리도 못했다. 그러니 이때다 싶어 아빠를 닮은 나에게 화를 푸는 거라는 생각이 내 딴에 들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열다섯 정도로 어린 나이였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날밤 나는 내 애 먼 발가락들이 가여워 한참을 엉엉 울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전보다 할머니 보기가 더 껄끄러웠지만 할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바리바리 싸들고 와 나물들, 다듬고 무쳐서 냉장고에다 착착 넣어두고 떠났다.


할머니의 나물 반찬은 하나같이 다 씁쓸했다.





어릴 적 나물을 즐겁게 먹은 기억이 없어 그런지 나는 여전히 나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다 이 나물이라는 게 또 한바탕 다듬어봐야 데치면 한 줌도 안 돼 여간 허무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래는 해마다 잊지 않고서 챙겨 먹는 몇 안 되는 봄나물 중 하나다. 다른 나물에 비하면 손질도 어렵지 않은 데다가 저렴하고 먹는 방법도 간단해 눈에 보일 때마다 손이 간다. 국이나 무침보다 달래장을 좋아하는데 미리 만들어두면 정신없는 아침에 요긴해 그렇다. 



밥 한 공기에 반숙 계란 프라이 올린 후 달래장 비벼서 곱창김 싸 먹으면 으음, 오늘 하루치 운이 한꺼번에 몰려온 기분이 들 정도로 맛있다.




혼자 식탁에 앉아 가만히 물에 담가 놓은 달래를 손질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할머니 생각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나물 말고도 몸에 좋다는 온갖 보약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냄새를 풍기는 탕 등, 할머니는 참 부지런하게 엄마를 챙겼던 거 같다. 


그때는 몰랐던 할머니 마음을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렴풋,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첫아기 낳았을 때. 대부분 산부인과 1층의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본 후 산모의 병실로 올라오는데 제일 먼저 나부터 찾아온 사람은 엄마,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엄마는 갓 태어난 아기보다 자신의 딸아이가 잘 있는지 더 중요했던 것이다. 할머니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 소아마비로 세 살이 되도록 일어서지도 못하다가 기적적으로 걷게 된 자기 딸이 평생 노심초사였겠지. 


봄나물보다도

할머니 매질보다도

너네 엄마가 내 딸이야! 라고 외치며 뚝뚝, 흘리던 할머니 눈물이 제일 쓰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는 안다. 


달래장 만들기

1) 양념장 만든다 (간장 2, 매실액 1, 고춧가루 1, 깨 솔솔, 참기름 두 세 방울)
2) 손질한 달래, 썰어서 양념장과 섞는다

*달래는 손질하기 전 물에 담가 놓아야 이물질 제거가 수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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