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를 혼자 타게 되어버린 나에 대한 이야기
2025년 12월 28일, 이곳에 도착하고
불과 2주전까지 내 아침의 마음은 지금과 사뭇 다르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이 아름다운 도시, 샌디에고의 아침은 나에게는 두려움이었다.
운전이 무섭다는 생각, 나혼자서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못가는데 이렇게 앞으로 1년을 어떻게 사나,
하는 걱정때문에 눈을 뜨면 심란했고 뭘 먹어도 얹힌거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원래 흰머리가 많은 편이다. 30대 초반부터 흰머리가 많았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특히 심한 기간에는 눈에 띄게 빠르게 자라나는 새치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평일 야근, 주말 출근이 반복되다보니 염색할 시간조차 없었고
몇달을 훌쩍 넘기면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곤 했었다.
그런 내가 지난 1년간은 직장에서 좋은 기회를 얻어 국내대학원을 다녔는데, 그간 일때문에 받던 스트레스를 안받게 되자 새치가 거의 5개월간 생기지 않는 진귀한 체험을 했었다.
그랬던 내가 이곳 샌디에고에 도착하고 2주만에 다시 예전의 성성한 백발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건
순전히 운전 스트레스 탓이었다.
운전을 못하니까 룸메이트 H의 차를 얻어타고 다녀야 하는데 그게 너무 미안하고 불편하게 느껴졌고
거금 2500만원을 주고 산 내 차는 정작 주차장에 덩그라니 서있기만 하는게 너무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비싼 돈 주고 산 차는 나중에 팔면 되지만,
몇백만원이 들어간 차 보험료는 아까워서 어쩌나,
내가 어쩌자고 미국에 왔을까 후회하고 자책하기를 한달을 했으니
흰머리가 안나고 배길까.
어쩌다 연습삼아 H를 조수석에 태워 달릴때면 잔뜩 긴장해서 자꾸만 실수를 하고
사고가 날뻔을 여러번, 심장이 내려앉기를 수십번,
집에 돌아와 그날의 내 실수를 다시 되새겨보면 정말 죽을뻔했구나 싶어 좌절하기도 수십번.
그렇지만 혼자서는 죽어도 운전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사람 없는 한적한 시간에 혼자 나가서 고속도로를 타고 오라는 H의 조언을 따르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수가 없었다.
그렇게 흰머리를 기르며 1달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총 1시간 30분간을 혼자 운전을 했나보다.
난 오늘 헬스장에 갔다가(총 30분 소요), 영어 대화 모임에 가기 위해 큰 몰에 들렀고(10분 소요),
집에 돌아와서(20분 소요) 점심을 먹고 골프연습을 하러 다녀왔다(왕복 30분).
내가 사는 apartment에 헬스장이 딸려 있긴한데, 공간이 좁고 기구가 많지 않아 2주 전에 H와 함께 체인점 gym을 등록했다.
우리집에서 gym까지 가려면 차로 15분정도는 달려야 한다.
오늘은 헬스를 마친뒤 H와 나의 일정이 각기 달라 각자의 차를 타고 헬스장까지 갔다.
헬스장은 차로 15분거리이지만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오늘도 고속도로에서 진출로를 한 구간 먼저 빠져나간 바람에 길을 돌고 돌아 헬스장에 가느라 15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이 넘게 걸렸으니까 여전히 서투른 운전이다.
(나보다 20분 늦게 출발한 H는 이미 헬스장에 도착해서 수심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연락을 하려 하고 있었다. 오는길에 큰 사고라도 난줄 알았단다.)
허나,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사고가 나거나 큰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뒤차가 경적을 울리지도 않았고, 차선변경을 못해서 돌아돌아 간게 실수라면 실수이겠지.
그치만 혼자 운전을 하더라도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다는것을 이렇게 자꾸자꾸 경험하면서
혼자 운전하는게 더이상 전만큼 무섭지가 않게 됐다.
이런 나의 변화가 놀랍고 신기하다.
완전히 불가능이라고 생각했기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무려 한 챕터를 들여 정성스레 일기를 쓰는 것이다.
내가 한달만에 발전한 게 대견하고 놀라워서 말이다.(물론 미국에서 운전하기 위해 한국에서 거의 6개월간 도로주행 연수를 받았으니, 이정도밖에 못한다는걸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건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이렇게 장족의 발전을 한건 순전히 지난주 일요일 혼자 떠난 나들이 덕이라고 생각한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은 겁많은 초보가 가기에 좋은 주변 관광지를 챗 GPT에게 추천받아
혼자서 "로스 페나 스키토스 캐년카운티 보호지역"을 다녀왔다.
왕복 30분 거리였는데, 다녀오는동안 어떠한 문제도 생기지 않았었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안정감있게 운전을 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에서의 하이킹.
하이킹의 시작은 기대로 출발했는데 점점 갈수록 "이게 뭐지?? 더 가면 뭔가 대단하고 좋은 풍경이 나오려나?" 싶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 걷다가 발견한 표지판 "waterfall"
구글맵으로 검색하니 외국인들이 너도 나도 "너무 아름다운 waterfall"이라고 극찬을 한다.
여기까지 와서 안가볼수가 있나 싶어서 무작정 걷기로 한다.
그렇게 1시간 20분을 걸었다. 걷는동안 보이는 나무와 숲은 처음보았던 풍경만큼이나 실망스럽다.
숲과 산은 한국이 최고다.
샌디에고는 햇볕은 강한데 비가 거의 오지 않으니 나무들이 다 메말랐다.
그래서 꽃을 피우고 있는 나무들을 봐도 꽃이 생기가 없고 시들시들하다.
다 죽어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하이킹을 하려니 신이 나지 않았지만 waterfall 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땡볕에도 그냥 죽기살기로 걸었다.
그렇게 당도한 waterfall은 우리 외할머니댁 개울가보다도 더 볼 게 없었다.
그래도 거기가 명소라고 외국인들이 잔뜩 몰려있었고,
이렇게 생긴 waterfall에도 비키니를 입고 들어가 있는 젊은 처자가 있다는게 놀라웠고,
실망감과 허탈감을 안고 뒤를 돌아서 걷는데
하. 여기서 또다시 1시간 반 가까이를 걸어 주차장까지 가야한다는게 과연가능할까 싶었다.
이미 시간은 3시가 가까워 오고 있고
이곳은 5시가 되면 해가 넘어가면서 어둑어둑해지는데, 가로등이 거의 없다보니
오후 5시 30분 이후의 운전은 정말 위험하고 불안하다.
발걸음을 재촉하기로 한다. 무조건 앞만 보고 걸었다.
핸드폰 네트워크도 잘 터지지 않아 음악도 들을수 없었고 그냥 무념무상으로 걸었다.
그렇게 당도한 주차장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작은 당나귀 같은 내 코롤라.
얼른 타서 다시 집까지 같이 오며
멋진 경치를 보여주고 음악을 함께 들으며 돌아오는 내모습이
혼자 피식하는 웃음이 나오게끔, 대견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여전히 운전은 미숙하다.
그래도 불과 지난주만 해도 혼자 어딘가에 가려 할때면 구글맵에 "고속도로 제외" 옵션을 키고 1.5배 정도의 시간을 더 들여서 먼길로 돌아가기 일쑤였는데,
이번주부터는 "아 너무 멀어서 안되겠다. 고속도로 타는게 더 쉽고 빠르다"라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놀랍다.
이제는 한차원 다른 고민을 한다. 출퇴근 시간 차량이 많은걸 극복해야 한다. 전에는 그냥 차를 끌고 나간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었는데 말이다.
다음주에 혼자 20분거리의 관광지를 가야하는 아침일정이 생겼는데, 그날은 사람들의 출근시간을 피하기 위해 새벽 6시 반에 출발해서 약속시간보다 2시간 반 먼저 가서 대기하고 있으려 하고 있다.
전에는 나혼자 운전하는게 두려워 H를 태워야만 했었는데,
이제는 H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아도 될수 있게, 괜히 길 잘못들어 멀리 돌아가는 일이 생겨 H의 시간을 빼앗을까봐 조바심 나는 마음이 안생기게끔
그냥 혼자 운전하는게 더 맘편하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적응이랄까,
내 마음이 편해지니 많이 웃게 되고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더 커지고 높아진다.
혼자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니 집에 있는 시간이 아까워 어디든 나가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혼자서 여유있게 한적한 해변가나 관광지를 걷는 상상을 해본다.
이제서야 떨리고 설렌다.
더 많이 찾아보고 검색해서 샌디에고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알차게 하루하루를 보내야지 생각해본다.
정말 다행이다. 3월이 되면 더 많이 좋아져 있겠지. 7월이 되면 완전 날아다니고 있으려나.
12월이 되면 한국에서 어떤 차를 사서 끌고 다닐까 고민하고 있을까.
한국에 돌아가면 그동안 엄두 못냈던 지방소도시와 관광지들을 렌트해서 여행다니는 상상도 해본다.
내가 시간이 될때마다 엄마를 태우고 경치좋은 관광지도 가고 온천도 가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가보는
멋진 딸이 되는 그런 상상도 해본다.
앞으로 아무탈없이 무사히 운전할 수 있기를.
자신감을 갖고 용기를 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