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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다희 Jul 23. 2021

엄지손가락 공주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명작(엄지공주)

엄지나라의 엄지손가락 공주에게도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인간 세상으로 향하는 날 말이다.


“아빠,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붉게 상기된 얼굴의 엄지손가락 공주가 초조한 듯 엄지손가락 왕에게 말했다.

 

“물론이지”

엄지손가락 왕이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도 미리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구나. 인간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하는 곳이란다. 아빠가 다녀왔던 시절과 지금의 인간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만 같아. 아빠는 체한 곳을 지압하거나, 머리를 시원하게 감기는 일 따위를 했었는데, 네가 해야할 일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인 것 같구나.

하지만 너라면 분명 잘할 수 있을게다. 아빠는 널 믿는다.”     


진분홍빛 하늘 아래 연분홍빛 동산이 아름다운 엄지나라.

엄지손가락 공주는 턱을 괴고 앉아 하이얀 손톱달이 ‘툭’ 잘려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떠오른 손톱달이 떨어졌을 , 엄지손가락 공주는 잘린 손톱달 배를 타고 인간 세상으로 향했다.    


엄지손가락 공주가 엄지나라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의 엄지손가락이 인간세상의 일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엄지손가락 공주가 치러야 할 시험이었다.     


까만 밤, 엄지손가락 공주는 새액새액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구름이의 엄지손가락에 도착했다.

그리곤 아이의 엄지손가락에 살포시 누워 떨리는 손으로 봉인된 시험지를 풀었다.

엄지손가락 공주가 치러야 할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엄지나라의 왕은 신속, 정확해야 한다.

구름이의 엄지손가락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핸드폰 자판을 칠 수 있도록 돕는다.     

둘째, 엄지나라의 왕은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구름이의 지문이 정확히 인식될 수 있도록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숨을 참고 기다린다.     

셋째, 엄지나라의 왕은 백성을 격려하고 칭찬할 줄 알아야 한다.

구름이가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친구를 격려하고 칭찬할 수 있도록 한다.     

넷째, 엄지나라의 왕은 신하들과 협업할 줄 알아야 한다.

구름이의 다른 손가락들과 협업하여 정확한 타이밍에 컴퓨터 자판의 스페이스 바를 누른다.

   

‘핸드폰, 지문인식, 컴퓨터...’ 모두가 인간세상법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이었다.     

‘긴장하지 말자. 잘할 수 있어...’  

마음 속으로 읖조리던 엄지손가락 공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르르 잠에 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엄지손가락 공주가 눈을 떴을 때 구름이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구름이는 학원 수업이 끝나갈 무렵, 엄마에게 데리러 와달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엄지손가락 공주는 최선을 다해 자판 징검다리를 건넜다.

하지만 ‘엄마 데리러 와’라는 메시지를 보내야 했던 엄지손가락 공주는 긴장한 나머지 ‘임마 데리러 와’라고 오타를 치고 말았다.

엄지손가락 공주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자신의 실수보다는 구름이가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을까 하는 생각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구름이를 데리러  엄마는 오히려 깔깔 웃으며 구름이를  껴안아주었다.     


구름이 엄마는 구름이를 집 앞에 내려주고 장을 보러 떠났다. 엄지손가락 공주는 구름이가 지문인식을 통해 집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숨을 꾹 참은 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엄지손가락 공주가 숨을 오래도록 참아도 구름이의 엄지손가락 지문은 잘 인식되지 않았다. 엄지손가락 공주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침착한 마음으로 양손을 호호 불어 비벼 얼굴에 물광 화장을 했다. 엄지손가락 공주의 수분기 있는 물광 화장 덕에 마침내 구름이의 지문이 정확히 인식됐다. 구름이는 더위를 피해 집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구름이는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엄지손가락 공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름이는 '따봉'을 외치며 친구를 엄지손가락으로 칭찬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엄지손가락 공주는 인간세상법 수업 시간에 배웠던 SNS를 떠올렸다. SNS의 ‘좋아요’ 표시는 대개 엄지손가락을 위로 쳐들고 있는 따봉 모양으로 생겼다. 엄지손가락 공주는 구름이가 SNS를 통해 친구가 쓴 글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좋아요’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했다.     


또 구름이가 학교 숙제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다른 손가락들과 협업하여 타이핑을 마쳤다.



   

이렇게 엄지손가락 공주의 시험이 모두 끝났다.

엄지손가락 공주는 자신의 실수와 애매한 수행 내용들을 떠올리며 시험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어쨌건 나는 최선을 다했는걸. 이제 결과는 내려놓고 맡기는 수밖에 없어...’

엄지손가락 공주는 조금은 서글펐다.

하지만 인간세상에서 구름이와 좋은 추억을 만들었던 것만으로도 의미있었노라 자신을 위로하며 새로 자란 손톱달을 타고 엄지나라로 향했다.

 

조용한 밤일거라 생각했던 엄지나라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엄지손가락 공주가 모든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했다는 방송이 보도되고 있었다.

새로운 여왕을 환영하는 플랜카드들도 곳곳에 걸려 있었다.        


엄지손가락 왕이 엄지손가락 공주를 마중 나와 이야기했다.


“시험 자체보다 구름이를 걱정하고 염려했던 너의 마음, 흐린 구름이의 지문 위로 물광 화장을 했던 너의 기지, 구름이에게 맞는 방식으로 칭찬과 격려를 할 수 있도록 도운 너의 배려. 이 모든 것이 너의 왕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는구나. 역시 너는 장한 내 딸, 엄지나라의 여왕답다.”    


진분홍빛 하늘 아래 연분홍빛 동산, 아름다운 엄지나라에 또 다른 하이얀 손톱달이 자란다.

엄지나라의 새로운 여왕, 엄지손가락 공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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