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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 Jul 26. 2020

그곳에 그가 있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면 돼

    

그 때 비행기를 처음 탔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하늘을 난다는 사실이, 촌스러워 보일까 아무에게도 말은 못했지만, 신기했다. 선배가 컴퓨터에 접속해서 이것저것 입력하더니 항공권을 구매해 주었다. 


“왜 하필 LA야?”


타닥, 컴퓨터 자판을 치며 선배가 물었다.  

순간 멈칫했다. 으음, 왜 그곳이냐면요, 왜 하필 로스엔젤레스냐면요……,

... 그곳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옛 남자친구가 LA에서 유학 중이었다. ‘옛’이라는 글자를 꼭 붙여야 한다. 그 당시 이미 그와 나는 헤어진 상태였으니까. 

탁, 선배의 손이 멈추었다. 


“아니, 헤어진 애인을 만나러 바다 건너 이 멀리까지 간단 말이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때까지 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나는 바다 건너 그와 크고 작은 고민을 나누곤 했다. 그는 나의 구남친이었다는 장점(?)을 십분 이용, 적당한 공감과 유용한 충고를 더해주었다. 

만나보면 애인보다 친구로서 더 좋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딱 그런 타입이었다. 그래서, 애인이 친구가 될 수 있는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 라고 대답해줄 수밖에 없다. 나는 직접 그런 사이를 겪은 적이 있으므로.      

아무튼, 첫 해외여행지가 LA가 된 것은, 그가 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가 너무나 편안한 말투로 ‘어어, 놀러와. 재미있을 거야’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에.  

한때 온종일 시간을 함께 보냈던, 나를 아주 잘 아는 그를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는 나와 잘 통했을 뿐만 아니라 말을 무척 재밌게 잘했다. 물론 그와의 수다(!)가 그리워서 미국까지 간다는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리하여 마침내 공항. 그곳의 공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떠남과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 바닥을 구르는 트렁크의 바퀴들, 분주한 발걸음, 긴장된 호흡, 나지막한 대화들, 엔진이 가동되고 비행기가 날아오르고…….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이, 시작하는 사람들과 끝낸 사람들이, 교차되고 섞이는 공간. 공항은 마치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다.  



비행기에 올랐다. 내 인생에서 가장 먼 길을 떠나는 시작이었다.  

이코노미석은 비좁았고 또 몹시 추웠다. 비치된 얇은 담요를 둘러쓰고 오들오들 떨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낯설어서 불안했다. 그곳에 가면 그가 있을 거라는 사실만이 내 불안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이 상황에서 내게 익숙한 단 하나였으니까. 


“쉬워! 일단 비행기에서 내려! 그리고 공항 출구로 나와! 그럼 내가 보일 거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냥 다른 사람들 따라가면 돼.”     


나는 시킨 대로 했다. 사람들의 무리를 따라 비행기에서 내려서 그 행렬이 하는 양을 흉내 내면서 출구를 찾았다. 

그리고, 빛이, 그러니까 그가 보였다. 

조금 야위었지만 건강해 보였다. 뒤로 야자수가 보였다. 비현실적이었다. 


“여어, 혼자서 잘 찾아왔네?”


익숙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여행은 즐거웠다. 원했던 대로 수다도 실컷 떨고, 같이 신나게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마음 잘 맞는 편한 친구가 얼마나 좋은지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 다시 혼자가 되었다.  

또 혼자…….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놀란 금발의 승무원이 다가와 물었다.  


“Are you OK?”


괜찮은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순간 비수처럼 꽂혀 들어온 외로움이 너무 차가워서 소스라쳤을 뿐. 겨우 눈물을 그쳤을 때,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나는 그때 인생의 진리 하나를 깨달은 것 같다. 


인간은 모두 혼자라는 것. 

누구와도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다는 것. 

나는 다만 한 개의 좌석을 차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미지의 세계가 두려워서 혼자 떠나지 못한다는 당신을, 이해한다. 진심으로. 나도 그러했으니까. 공항 출구를 찾아 나오기만 해.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라고 말해주었던 그가 없었더라면 나도 첫발을 떼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첫 번째 발걸음을 시작할 수만 있다면 두 번째는 조금 더 쉬울 거라고. 누군가 마중 나오는 일은 한 번으로 충분할 거라고. 혼자 도착한 당신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공항의 출구를,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곳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감히 나는 확신한다.

당신은 의외로 쉽게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여행을 시작하기만 하면. 



* 이 글은 저의 다섯번째 책 <이미 애쓰고 있는데 힘내라니요?>(위즈덤하우스, 2018)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벌써 아주 오래된 일이에요. 이렇게 첫 비행기를 탄 후, 혼자서 꽤 많은 여행을 했더랬죠. 심지어 여행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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