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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ny Aug 22. 2020

온실 속 화초가 잡초가 되는 과정   

우리는 다 들판의 잡초가 아니던가

이 글은 나의 암흑기 시절, 한 줄기 빛과 같던 내 소중한 벗, L에게 받친다.


L을 처음 만난 건 캐나다 조기유학 시절, BSS에서였다.
그녀는 10학년이었고 나는 10학년이었다가 영어를 도저히 못 알아 들어서 9학년으로 다운그레이드 되었다. 한국에서 자존심 하나로 살아갔던 나인데 학년이 떨어지니 내 자존심을 심히 건드린 유학생 담당 카운슬러 W도 ESL 담당 선생님이었던 K도 둘 다 엄청 꼴 보기 싫을 정도였다. 내가 부정적인 애가 된 대표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점심시간 카페테리아에서 처음 본 L은 싸온 점심을 조용히 먹고 있었고 나는 우리 학교에 몇 안 되는 한국 학생들과 통성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낯을 가린다고 항상 생각하지만 10대 시절 내 친구들은 내가 낯가리는 성격이라고 하면 박장대소를 한다. 그런데 나는 분명 낯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다.


조용조용한 성격의 그녀와 성격이 완전히 다른 나는 사실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 급 친해질 수 있었는지 20년이 된 지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친해진 이유를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 둘 다 기독교였고 H.O.T. 오빠들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녀가 사용하지 않는 예전 이멜 주소가 hjlov로 시작하는 거였는데 그녀는 희준오빠 바라기였고 나는 안토니 빠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꾸준히 H.O.T. 바라기였으나 나의 최애는 그 이후로도 계속 바뀌었다. 아무튼 주대화가 오빠들 이야기였으니 우리는 가까워지려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캐나다로 조기유학을 왔고 공부도 제법 잘했다. 후에 모든 이들이 그녀의 바인더(족보)를 탐내었으니 그것은 감사하게도 내 것이 되었다. 금요일이면 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공부도 하고 (일방적으로 그녀가 날 가르쳐준 게 더 많았지만) 주일에는 교회 예배도 함께 참석하였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에는 그녀의 어머님이 교회 근처 짜장면 집과 한인 식품점은 꼭 데려가 주셨다. 그만큼 내 유학 생활의 질을 높여준 장본인이고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나에게 제일 소중한 가족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유학하는 동안 친구들의 어머니들 덕분에 내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던 거라고 잘해야 한다고 늘 말한다.


L의 아버지는 잘 나가는 사업가셨다. 그리고 공부를 곧 잘하던 그녀에 대한 기대치도 매우 크셨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잘 받은 게 확연히 티가 났고 할 줄 아는 게 많은 만능 재주꾼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캐나다에 가장 좋은 대학에 가서 경영학을 전공할 것이고 후에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거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적도 있다. 그런 그녀가 대학 준비를 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졌다며 어머니께서 모아두신 돈으로 유학 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 이야기하였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주신 돈으로 그녀는 대학 학비는 문제없을 것이라 하였다. L은 캐나다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유명 대학 경제학과를 당당히 합격하였고 나는 그녀와 떨어지게 되어 슬펐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그녀가 다니는 학교에 도전하겠다며 약속하였다.


한창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에 그녀는 생활비 걱정으로 인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고 하였다. 캐나다는 학생비자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유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식당 허드렛일이었고 불법으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페이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인복이 많아 다행히 2학년 때는 친한 선배네 집에서 살 수 있어 렌트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하였다. 그 후, 나는 그녀가 있는 토론토에 Y대학을 입학하였다. 토론토에 가기 전에 우리는 자주 만날 것을 예상했지만 그녀는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여 바쁘게 지냈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그녀는 모든 학업을 중단하고 한국으로 들어갈 것이라 했다. 이미 밴쿠버에 계신 어머님과 동생은 정리를 해서 들어간 상태이고 자신도 한국에서 일을 하며 다시 대학을 준비하겠다며 말이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버티겠다 말하던 그녀인데 갑작스레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한 L의 통보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반년만 더 버티면 그녀가 학사 편입으로 한국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을 텐데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그녀에게 응원을 해줬더라면 좋겠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는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한국에 있어도 우리는 자주 연락했다. 나는 내 학교 이야기, 연애 이야기를 해주느라 바빴고 그녀는 그녀의 새로운 알바와 대학입시 준비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몇 년을 살아갔다.  2009년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무작정 그녀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당분간 살 데가 없으니 니 방에서 같이 지내겠다고 말이다. L 어머님은 방이 좁은데 괜찮겠냐며 걱정하셨지만 예전 캐나다에서 L이 지내던 방도 사이즈 자체는 크게 차이가 없어서 그녀도 나도 괜찮다고 했다. 사실, 친척집에 가는 것보다 L네 집에 먹을 거 잔뜩 들고 찾아가서 L어머니랑 L이랑 오손도손 수다 떠는 게 더 즐거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가 우리 집에 오는 것도 내가 그녀의 집에 가는 것도 너무 당연해졌다.


오늘 그녀는 꿈에 그리던 석사 학위를 따내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놈에 학사학위 언제 따냐 고민했던 그녀인데 다행히도 석사 학위는 2년 반 만에 따 내었다.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그 스트레스 속에서 수 십 번, 수 백번의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꿋꿋하게 이겨낸 그녀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어느 누구보다 곱디 고운 온실 속 화초였던 10대 소녀는 모진 풍파 속을 견디고 또 견디다가 이제야 꽃을 피우는 이름 모를 잡초가 되었다. 그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씩 앞으로 전진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를 그녀가 지켜낸 것이라 생각된다. 지난 20년을 우리가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서로의 성공을 묵묵히 응원하는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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