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그림 실험' 시작

Art on the Move 두루 다니며 그리는

by 붱draw

2025년 연말, 방콕 아트 컬처 센터에서 태국 공주의 사진전을 보았다.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홀 가득 사진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찍은 풍경과 왕실의 행사 사진들이 전시의 주를 이루었다. 만약 일반인의 사진전이었다면 ‘특출 난 예술 작품처럼 보이진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큰 개인전을 열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실 가족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그런 의문은 무의미했다.


나에겐 특별한 신분도, 독특한 이력도 없다.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나와 대중에게 각인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만의 분명한 색이 필요하단 생각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누가 보아도 ‘아, 이 작가 작품이네.’ 하고 알아볼 수 있는 힘 말이다. 동시에, 오랫동안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들을 보며 그것은 고정된 형식이나 색에서 비롯되기보다, 변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끝내 남는 그 사람다움에서 생겨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변화하되, 작품 안에 중심을 남겨두는 일. 아마도 그것이 창작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만약 개성이나 색 같은 고민 없이, 그리는 행위 자체로 만족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더 자주, 더 가볍게 그림을 그리며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하다. 아직은. 한국에서 캐리커처 작가로 일할 때, 그림은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미국에서 초등 미술 교사로 일할 때는, 수업 준비와 학생 관리에 쫓겨 정작 내 작업에 깊이 몰두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그림 기술 역시 충분하지 않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시도하고, 실패하며, 또다시 그려보는 과정 자체가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도전이자 배움이 될 것이다.


작년 가을에 싱가포르로 이주하면서, 나는 반강제적으로 경제활동을 멈추게 되었다. 이름부터 마음에 안 드는 Dependent visa, 이른바 ‘의존 비자’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리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살림 노동을 하며 느낀 점들도 많아, 아마 이 연재에 한 번쯤은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이 시간은 거의 처음으로 주어진, 언제 다시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를 은퇴 예행연습 같은 기간이다. 나는 이 시간을 그림에 집중하는 데 써보기로 했다.


물론 여기에도 복병은 있다. 그림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는 일이 단순히 그리기만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거다. 나와 세계, 그리고 작업이 하나로 포개어지는 순간을 포착하고, 그 에너지를 유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일명 ‘몰입’. 아이들이 스케치북 앞에서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크레파스를 쥐고 그려 나갈 때처럼. 그래서인지 나는 어린아이들의 그림을 유독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몰입의 순간에 다가가기 위해 ‘엉덩이의 힘’, 즉 양을 통해 질로 가는 방식을 택한다. 그 과정이 늘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상대적으로 여유 시간이 많아진 지금의 나는, 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몰입의 순간이 찾아와 주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미국 초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유치부부터 5학년까지 모든 학년을 대상으로 한 시간씩 수업을 진행했다. 설명, 시범, 작업, 정리로 시간을 나누었지만, 유치부 아이들에겐 그마저 버거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담임교사와의 상담에서 들은 말은 ‘structure, 구조가 단단한 수업이 필요하다’는 조언이었다. 그제야 어린아이들에게는 더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구조가 필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그 유치부 아이들과 비슷한 상태다. 나에게도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연습 구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적기로 했다. 기록하기로 했다.


고백하건대, 앞으로 써 나갈 이야기들에는 정해진 플롯이 없다. 몇 화로 이어질지,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그리다 보면 쓰게 되고, 쓰다 보면 그리게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을 뿐. 분명한 것은, 나다움을 작품에 불어넣기 위해 시도하고, 실패하고, 또다시 그려가는 과정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 기록이 쌓여가며 정말 ‘내 색’이 생길지, 결과 없는 실험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설령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그 끝이 허무하지 만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이 작업에 시동을 걸어주는 듯하다.


나의 그림 실험을 기록하며, 이미 이 길을 걸어온 사람들, 혹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어지길 바란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길에 첫 발을 내딛는 작은 용기, 그리고 느리더라도 꾸준하고 싶은 소망을 담아.

Art on the Move! 두루 다니며 그리는 '그림 실험 시작.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