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그래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작은 성공의 기억

by 붱draw

싱가포르의 시간은 유난히 빨리 가는 것 같다. 미국에서 이주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다시 그리고 싶었지만, 시작이 쉽지 않았다. 별 성과 없는 날들에 '적응 중'이라는 핑계도 힘을 잃어갈 즈음, 2026년 새해를 맞았다. 여느 때처럼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다 한 포스팅이 눈에 들어왔다.


‘Caricature Resolution 2026’.


국제 캐리커처 협회에서 매해 1월 한 달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하루에 한 명, 서른한 날 동안 매일 다른 인물을 캐리커처로 그린다.


‘어, 이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종착지가 보이지 않더라도, 가고 싶은 방향만 분명해지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오랜만에 방향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치부 아이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 캐리커처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그림으로 돈을 벌었던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멀어졌다가도 다시 돌아가게 되는, 뿌리 같은 작업이다.


캐리커처 레졸루션에 처음 참여한 것은 2021년 1월이었다. 하루에 한 명씩, 서른한 명의 얼굴을 그렸다. 쉽지 않았지만 끝까지 해냈고, 그 경험은 적지만 분명한 성공의 기억이 됐다. 그 이듬해에도 다시 도전했다. 그때는 콜라주 방식으로 변화를 주었고, 그 과정이 꽤 즐거웠다.


아이들에게 미술을 지도한 지난 3년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개인 작업은 거의 하지 못했다. 다시 그리고 싶어 졌을 땐 그리는 방법을 다 잊은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새해 캐리커처 다짐 프로젝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과제를 완수했던 경험이, 비슷한 상황을 앞두고 생각보다 빠르게 자신감을 회복시켰다. 그때의 작은 성공 기억이, 이번에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었다.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어떤 스타일로 그릴지 노트를 펼쳐 훑다가 눈이 멈췄다.


‘사람을 owl(부엉이/올빼미)로 그리기.’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다. 예전 실력이 다 나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른 작가들의 멋진 작업 앞에서도 덜 주눅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과슈의 불투명하고 매트한 느낌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를 주 재료로 인물을 아울로 재해석했다. 그렇게 서른한 날을 채웠다.


Caricature Resolution 2026, 31명의 인물을 31마리의 아울로 표현했다.

1월 31일, 31개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보니 뿌듯했다.


캐리커처 프로젝트를 끝내는 날이 다가올 무렵, 2월에는 무슨 작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 있긴 하지만,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의 나인 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다 이 연재를 시작하기로 했다. 쓰다 보면 길이 보일 거란 믿음에.


여전히 막막하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첫 번째 그림 실험 보고서>


실험 제목: 캐리커처 레졸루션 프로젝트 참여

도전 과제: 2026년 1월 한 달간, 하루 한 개 캐리커처 완성

목적: 끝이 명확한 도전으로 성취감 경험

재료 및 시도: 과슈를 활용한 아울(부엉이/올빼미) 스타일 캐리커처, 기존 스타일에서 완전히 다른 접근

성과: 31일 동안 31개의 캐리커처 작품 완성, 성취감과 자신감 회복

느낀 점: 스스로 선택한 ‘끝이 있는 도전’으로 얻은 작은 성공은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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