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해서 담을 넘다 - <취유부벽정기>, <이생규장전>
어려움을 바로잡다
계유정난은 다른 ‘왕자의 난’, ‘임진왜란’에 쓰는 ‘어지러울 란(亂)’이 아닌 ‘어려울 난(難)’을 쓴다. 조선왕조실록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이렇게 기록한 취지는, 이 사건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 사건이 아니라 '나라의 어려움을 바로잡은[靖]’ 사건이라는 것이다.
세종의 태평성대를 이어받아야 할 문종이 백성의 기대와 달리 일찍 세상을 뜬 후, 왕으로는 너무 어린 나이인 12세의 단종이 즉위하였다. 문종의 고명대신(顧命大臣)이 된 김종서는 왕의 오른쪽 자리를 한껏 누리고 있었고,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아마도’ 위태로운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이 성공한 후의 시대가 남긴 기록은 이런 어려움을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형(문종)의 아들이라도, 가족이라도 내치지 않을 수 없었고, 권력의 특성상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 생각은 왕(세조)의 뜻이 아니라 똘똘한 신하 신숙주의 뜻에서 비롯됐다고. 이처럼 역사에서 권력을 가운데 두고 가족끼리 피를 주고받은 사례는 생각보다 흔하다.
신숙주
계유정난이 벌어지는 가운데 많은 조정 대신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중 신숙주는 새로운 권력을 택했다. 우리는 그 선택을 쉬이 맛이 변하는 나물의 이름에 붙여 영원히 ‘변절’로 기억하지만, 그는 그로 인해 세종이 못다한 제도 정비를 마무리했다. 신숙주와 수양대군은 세종 대부터 한 일이 많았다. 신숙주는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대왕의 한글을 언급할 때면 박팽년, 성삼문과 함께 늘 등장하는 인물이니 말할 것도 없고, 수양대군 역시 세종의 중요한 책무를 도맡았다. 조선 다른 왕들과 달리 세종은 왕자들에게 많은 일을 시켰다. 세종대왕이 워낙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건국 초기 인재 풀이 세종의 성에 차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세종의 수많은 뜻을, 아직 어린 단종이 그를 모두 이어받았을 리 없다. 그걸 전해 주어야 할 아버지 문종까지 일찍 세상을 뜬 판국이었다. 신숙주 입장에서는 수양의 권력욕과 별개로 세종의 수많은 방법론을 그냥 버리기 아까웠을 것이다. 단종이 이를 이해하고 실행에 착수하기를 기다리기에는 세월이 필요했고 이미 서른을 넘긴 자신과 시간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세종의 개혁을 이어 조선의 비전을 심을 욕심은 수양대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그렇다고 왕을, 그것도 조카를 내치다니. 조선의 근간인 유교와, 그 기본 정신인 인의(仁義)를 파괴한 패륜이다. 충신불사이군(忠臣不士二君)이며, 조선의 왕은 적장자상속 원칙에 따라 세자를 거쳐 왕이 된 단종뿐.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사육신(死六臣), 그리고 생육신(生六臣)이었다. 그러나 이미 하늘은 빼앗은 자의 몫이었고, 천륜은 새로운 권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사육신은 새로운 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전하” 대신 “나으리”라 부르며 조롱하면서 참형을 감수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시습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민간에는 물론 이미 세종에도 알려진 바 있던 김시습은 온갖 유교 서적을 이미 탐독해 섭렵했다. 그런 그가 17세의 나이에 목도한 계유정난의 현실이 얼마나 실망스러웠을지 헤아려본다. 활자로만 적힌 선인(先人)들의 깊은 생각들이 입체적인 현실의 이해관계 속에서 적용될 때는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엉킬 수 있는지 아직 경험하지 못했을 나이다. 그는 준비하던 과거를 집어치우고 갓대신 삿갓을 쓴 채 조정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간다.
금오신화
어느 몇 년은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고, 어느 몇 년은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살았다. 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놓지 않았는데 이제는 유교만이 아닌 도교와 불교를 모두 섭렵했다. 알고 보니 유교 아닌 사상도 모두 그 만큼 그 무게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경주 금오산에 당도해 쓴 이야기가 총 다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금오신화>다.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이 믿고 싶었던 신의 모습을 이야기로 만들었듯, 김시습도 자신이 만나고 싶은 이(들)을 <금오신화> 안에서 실컷 만난다.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이 담을 넘은 순간 펼쳐진 새상은 도리화(挑李花)가 흐드러진 낙원이며 이는 유교 아닌 도교의 이상향이다. 홍건적의 난으로 이생을 뜬 최여인이 환생하는 것은 불교의 생각이다. <취유부벽정기>의 홍생은 집안 좋고 외모 출중해 이름난 기생들도 줄줄 따르는 ‘엄친아’, ‘사기캐’이지만 속세의 산물은 그에게 아무 무게가 없다. 그런 홍생이 술과 부벽정의 정취에 빠져 맥수지탄(麥秀之嘆)을 읊는 가운데 그 앞에 나타난 신선은 부벽정이 있는 평양을 중심으로 천 년쯤 전 한반도 북쪽에 자리잡았던 고조선 혹은 가상의 은나라 마지막 왕조의 딸이었다. 이렇게 만난 홍생과 신선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이제는 사라진 그들의 나라를 그리워한다. 이즐이 ‘은’이라 부르는 나라는 고조선을 뜻하고 그들이 노래부르는 나라의 모습은 지금의 조선, 이제 더 이상 왕 아닌 왕(세조)이 차지한 지금 조선의 조정을 말한다.
<금오신화> 속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의 주인공 모두 현실에 없는 대상을 만나고 연모하지만, 결국은 내세로 혹은 하늘로 돌아간다. 운명으로 돌아간 상대를 그리워하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단종과 사육신을 그리워하는 김시습 자신이다.
취해서 담을 넘다
<이생규장전>의 ‘규(窺)’는 넘다, ‘장(墻)’은 담이다. 이 소설에서 이생이 넘은 ‘담’은 유교의 담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조정이 스스로 유교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모습에 실망해 돌아섰던 김시습이 소설 속에서 유교의 담을 넘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한낱 인간이 구축한 사상의 담을 넘어본들 죽은 왕이 돌아오지 않고 인간이 저지른 패륜을 돌이킬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유교의 담을 넘고 보니 신숙주와 같은 권력과의 자유연애 역시 자연의 섭리 안에서는 작은 미물의 움직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을까? 단종복위운동 후 국문을 받던 성삼문이 세조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신숙주에게 “너는 왜 거기 서 있느냐” 호통치니 신숙주는 부끄러워했고 세조는 그런 충성스러운 신하릉 가진 단종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반면 세조와 신숙주의 콤비네이션이 없었다면 조선은 어떤 나라가 되었을지 모른다. <경국대전>이 탄생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세종의 많은 개혁안들이 생과 사의 운명 안에 묻혀졌을지 모른다. 이들이 그러는 동안 김시습은 조선의 사상과 법도의 절대적 틀이라 여겼던 유교의 한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오랜 기간 세상은 사육신과 생육신을 기억하고 기렸다. 권력의 틀 안에서는 그 틀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여 공고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권력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학은 신숙주와 수양대군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결국 어떤 순간에는 무언가에 취해 담을 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음도, 역사의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