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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수진 Mar 29. 2021

프란츠 카프카 변신(Die Verwandlung)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 단편

1915년에 쓰여진 소설인데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한다는 SF적 설정이라니.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은 이렇게 첫인상부터 낯선 감정을 공유하며 다가선다. 그의 이 소설 번역본이 정말 많지만 그 책들이 삽화로, 특히 표지 삽화로 벌레를 그려 두지 않는 편이 좋은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철갑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들어 보니 아치형의 각질 부분들로 나누어진, 불룩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다. 금방이라도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은 이불은 배의 높은 부위에 가까스로 걸쳐져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애처로울 정도로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그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하릴없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 열린책들 <변신> 첫 문장


소설의 묘사로 그 모습을 그리는 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신의 마음으로 그린 벌레에 아주 조금의 정보를 더한 단어 '갑충'이라는 표현으로 이 소설을 시작하면 충분하다. 벌레 중에서도 몸이 딱딱한 벌레라는 '갑충'이라는 낯선 단어도 사실은 사족이다. '벌레'로 충분하다. 그렇게 독자의 상상력을 그저 놓아두어야만, 독자가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 전개를 함께 하면서 이미 벌레로 변해 버린 상황에서 시작된 시간 속 이야기를 공감해 나갈 수 있다. 


카프카의 시대와 그 시대 유럽의 분위기를 알고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 이름이 그레고르 잠자였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그 사람이 산업혁명이 가져온 무서운 경제발전의 관성 속에, 중세부터 이어져 오면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갈등의 시대를 겪은 유럽의 이방인 프란츠 카프카라는 착각을 계속해서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소설의 클라이막스로 빠져들면, 순간순간 그 인물이 현대 사회에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어떤 이방인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관성이 2020년대 오늘에도 지속된다는 의미일까. 


그레고르 잠자 Gregor Samsa의 Samsa는 Kafka에서 모음을 살리고 자음만 바꾸었다는 해석, Samsa가 체코어로 '나'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 등을 알고 나면, 시대와 사회를 아우르는 이 모든 입체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한 소설가 카프카의 사고(思考)에 대한 신뢰감이 증폭되면서 이른 바 '갑충'의 존재가 현대사회의 인간 존재까지 관통할 수 있음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거두고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체코에 사는 유대인이었다. 그런 그의 소설들은 체코어도 아니고 히브리어도 아닌 독일어로 쓰여졌다. 그는 출신과 언어 면에서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되는 극소수에 속했다. 아버지는 유대인 아닌 서구 유럽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고, 프란츠는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출신에서 비롯된 존재(identity)의 이유와 살아가는 방법이 궁금했던 사람이다. 아버지가 그저 우월한 다수에 속하고자 했다면 그 아들은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지향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평온함보다 컴플렉스(complex)가 이야기를 만든다. 다른 태생과 다른 시대로 인한 성장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해 온 사람들이 한 가족으로 살아간다.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사도세자도, 세상의 많은 부자(不子) 관계가 크고 작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겪지만 그 원인과 사정이 달라 늘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평온함을 좋아한다. 그레고르 잠자는 "내가 왜 이렇게 변했지? 어떻게 하면 빨리 사람으로 변할까?"라고 고민하지 않는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궁금해할지언정 그 일의 이유를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본래의 사람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평온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의 주변이 본래 평온했다면 그 상태로 돌아가려 하겠지만 그 전의 삶이 컴플렉스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가 사람으로 돌아가는 데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모습에 적응한다. 침대에서 안전하게 내려오는 법, 음식 아닌 먹이를 먹는 법을 익혀 나간다. 벽을 기어오르는 방법을 터득한 순간에는 '자유'를 느낀다. 이는 그레고르가 사람으로 살 때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그레고르 가족이 걱정하는 것은 벌레로 변신한 가족 일원의, 아들로서, 형제로서의 존재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벌레로 변하여 경제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서 더 이상 향유할 수 없게 된 각자의 생계와 여유의 권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그들은 각자의 돈벌이를 하러 나간다. 돈벌이를 하려 하니 그들은 쉽게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책임지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그러나 본인삶의 의미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삶. 그레고르는 가족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 그레고르의 모습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독자의 존재로 치환된다. 산업혁명 후 대량생산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 주는 기계 주도의 생산 과정에 인간의 노동력이 투입되었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개인의 삶 역시 9to6의 법칙, 즉 공장이 문을 열고 닫는 시간에 인간의 시간이 종속된 것이 시작이다. 이 시간의 법칙은 수요와 공급의 팽창하는 경제의 기류 속에서 대량생산이라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아닌 경제적 목적을 위한 가치 속에 빨려 들어갔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가 이 현실을 반영했다. <변신>을 읽는 2020년대으 독자는 이 이야기가 쓰여진 1910년대 중반의 법칙과 속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사진출처 : https://brunch.co.kr/@bookdb/1236

그레고르가 가진 가족-회사 중심의 사회에서의 소외,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의 인종-국가 사회의 소외 그리고 현대인이 느끼는 경제-기계 사회로 이어지는 가운데의 소외. 어느 시대든 누구든 때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고, 인간은 바로 그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오히려 존재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벌레 그레고르는 죽음을 택했고, 그 그레고르를 쓴 프란츠 카프카는 방황을 정리하기 이른 40대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쳤다. 


그 감성을 공감한다 하더라도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2021년의 우리는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혼가구'의 증가와 '혼족' 문화.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혼자(alone)'의 삶이라면, 기왕이면 외롭고 쓸쓸함의 키워드로 만들기를 거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삶의 본질이 혼자여서는 정말 안 되는 것일까? 인간(人間)의 인(人)이 서로 기대고 있는 두 개의 존재이고, 그 '사이[間]'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게 선인(先人)긔 가치인 만큼 변함없이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거듭된 역사를 통한 경험으로, 이제는 타인으로 인한 외로움보다 당당한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는 오늘날 인류에게 프란츠 카프카는 어떤 새로운 답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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