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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라노 Aug 24. 2022

한판 붙어 볼까?

씨앗글(2) : 씨앗글을 토대로 긴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입니다.

종종 지인으로부터, 오랜 기간 강의했는데 그중 인상 깊은 강의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생각해 보니 20년 동안 참으로 많은 곳에서 강의했다. 노숙인, 미혼모, 한부모 여성가장, 자활참여자, 어르신, 장애인, 탈북청소년, 탈학교청소년, 교도소, 구치소, 작은도서관, 공공도서관, 평생학습관, 전국의 인재개발원, 삼성전자, 몇몇 은행, 이런저런 대학들.



번뜩 떠오르는 강의가 있다. 말썽꾸러기 탈학교청소년들. 아무리 열강을 해도 강의에 집중하는 적이 없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법이 없다. 심지어 오늘 수업 어땠냐는 질문에 섬뜩하게도 "좆같았어요"라고 대답하는 녀석들이다. 그곳 강사들의 평균 강사수명(?)은 한 달(강의 4번)을 넘지 않았다. 한 달을 못 견디고, 질려서 무서워서 미워서 정나미 떨어진다며 달아나버리기 일쑤였던 것. 강사비가 저렴한 것도 이유였을 테고. 1시간 3만원, 2시간 강의하면 6만원ㅜㅜ.


나는 좀 달랐다. 아예 강사비 없는 곳, 더 험한 곳, 더 거친 분들 틈바구니에서도 거뜬히 버텨냈던 내가 아닌가. '거리의 인문학자'라는 별명, 거져 얻어걸린 것일 리 만무하고ㅋ.


버텼다. 그야말로 버텼다. 집 나간 아이들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으로. 한껏 싸우고 토라진 아이들 마음 돌릴 때까지 참아주는 마음으로.


아무리 거칠어도, 아무리 말썽꾸러기여도 아이는 아이다.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건 공부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밤샘 '알바'를 했기 때문이다. 주유소, 편의점, 술집... 이른바 44만원 인생들이다. 말이 거친 건 본디 심성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친 환경 탓이다. 거진 편부모 혹은 조손가정의 아이들이고, 더러는 어른보호자없이 동생들과 함께 사는 소녀가장도 있었다.


다그쳐서 될 일이 아니었다. 기다려줘야 했고 참아줘야 했고 감싸줘야 했고, 더러는 매섭게 혼내줘야 했고, 힘껏 안아줘야 했다. 맞담배를 허해야 했고, 함께 술잔도 부딪쳐야 했다. 무엇보다 함께 울어줘야 했다.


참 힘든 시간이었지만 어찌어찌 견뎌냈다. 그새 미운정 고운정이 들어서 별수없이 서로를 인정해주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졸업식, 연초 스무 명 이상이 함께 출발했지만 졸업식 때까지 남은 건 다섯 명뿐이었다. 아니다. 무려 다섯 명이나 모든 과정을 마쳤다. 다섯 명의 졸업을 위해 수십 명의 강사와 역시 수십명의 대학생멘토가 거쳐가거나 끝까지 함께 했다. 졸업식은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가족들이 울었고, 졸업생이 울었고, 모든 강사와 대학생 멘토들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날 한 아이가 다가와서 내 어깨를 툭 치며, 아조 시건방진 표정으로 툭 내뱉는 말이 "못 생긴 샘, 고마웠습니다."였다. 나도 대답 대신 녀석이 쳤던 것보다 두배 정도의 강도로 녀석의 어깨를 쳤다. 순간 녀석이 주먹을 쥐더니 한판 붙어보자는 자세를 취했다. 나도 지지않고 싸움자세를 취했다. 심판을 보겠다고 나서는 녀석도 있었다. 


"자, 오늘 지는 사람이 한턱내는 거다."


주먹싸움 대신 서로 끌어안았다. 심판 보는 녀석도 함께. 힘껏, 꽤 오랫동안. 바보처럼 눈물 흘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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