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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킹 Jun 20. 2021

우연과 우연의 교차점에 대한 생각

우주 저 끝의 다이얼이 맞춰져 돌아간다면

서울 사람 냄새 좀 내보고자 친히 압구정에 방문하여 도산 공원 산책과 베이커리 카페에서 너낌 있게 한 잔을 하고 다시 경기도민의 삶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후와 저녁 사이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시간에 나를 경기도민으로 복귀시켜줄 사당역 9번 출구에서 7800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그래도 버스가 낫겠다는 생각에 사당까지 왔다. 햇살은 부드러웠지만 바람은 조금 차가웠던 기다림이었다. 이윽고 다가온 2층 버스에 탑승한 나였지만  2층의 신기함 보다는 출구를 향해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 계단에 대한 걱정이 좀 더 컸기에 1층 자리에 몸을 맡겼다.

서울 사람 너낌납니까?


다음 정거장이었나? 아니면 다다음 정거장? 일단 서울을 벗어나면 중간에 탑승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편하게 두 자리 차지하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 남성이 올라타더니 망설임 없이 내 옆자리에 앉는다. 나의 대각선 뒤쪽으로, 등산 가방을 가슴 앞에 안고서는 통로 쪽에 앉음으로써 자리 방어에 성공한 아저씨가 조금은 미워 보였다.


이내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였고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 좁은 좌석을 빠져나왔다. 머쓱하게도 옆 사람도 이번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길, 좀 전 버스에서 나의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이 길로 가는 사람이 드물 텐데 이런 우연이 있나?’ 가볍게 생각하며 지나갔다. 그런데 집 앞까지 쫓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왠지 이상한 기운에 일부러 집을 지나쳐서 계속 걸어 나갔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이내 내가 사는 건물의 출입구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쑥 들어갔다. 뒤쫓아 들어가 보니 그 남자의 신발 벗고 들어가는 소리가 2층 복도에서 머물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서울에 놀러 갔다가 어느 알 수 없는 시간대에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여 지하철과 버스 중 버스를 택했고 2층과 1층 중 1층을 택했으며 드물게도 버스 노선 중간에 탑승한 어떤 남성이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그 남자가 내가 사는 건물 2층 이웃주민이었다. 세상 이런 우연이 있을까? 이 정도면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도 그리 어렵지는 않은 것 같다.





© bady, 출처 Unsplash                                


이 것이 가장 최근에 겪은 소름 돋는 우연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인생엔 이와 비슷한 우연의 순간들이 또 있었다.


2019년, 어느 러닝 브랜드에서 주최한 이벤트에 뽑혀서 괌 마라톤에 참가할 기회가 생겼고 10km 종목에 참가한 나는 다리가 성하지 않아서 크루 멤버들과 함께 아주 천천히 주변 경치를 구경하며 달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나처럼 천천히 달리고 있던 다른 크루 멤버를 만나서 인사를 나눴는데 알고 보니 같은 고향 사람! 이역만리 괌에서 개최된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다가 고향 사람 만나기!


그 이후 어느 날 고향에 내려가려고 교통편을 알아보다가 평소와 달리 버스를 타기로 결정하였고 또 평소와 달리 굳이 지하철을 타고 오산역까지 가서 오산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탑승했는데 이번에는 괌 마라톤에 참가한 또 다른 참가자를 우연히 만나 같은 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대학생 때 자전거를 시작하면서 우리 학교를 다니는 어떤 라이더의 블로그를 팔로우했었는데 당시 라이딩도 많이 다니고 워낙 인기도 많던 라이더(요즘 말로 ‘로드 여신’의 시초라 할 수 있겠다)였기에 뭔가 TV로만 접하는 연예인 느낌 나는 분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흘러 나는 고향에서 러닝 크루를 결성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우리 크루에 가입했다! 알고 보니 내 고향 바로 옆 동네 출신인데 잠시 고향에 내려왔다가 운동하고 싶어서 검색했는데 그게 우리 러닝 크루!


적고 보니 우연하게도 모두 달리기와 고향이 결합된 우연의 결과이다. 이것 또한 지극한 우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연 중 드물게 몇몇은 우연을 넘어 필연이 될 수도 있겠다. 우연과 우연이 만나 일으키는 떨림이 마침내 공명을 일으키면 우주의 다이얼이 달칵하고 움직여 인과관계의 톱니바퀴가 돌아가고 그때부터 필연으로 맞춰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상상해본다. 그리고 우연이냐 필연이냐는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또 어떤 우연이 필연으로 다가올까? 이를 생각해보면 인생은 꽤 재미있겠다는 긍정의 마음이 들어선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줄 우연은 이미 당신의 주변을 감싸고 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의 방향에 따라 우연은 점차 각각의 형태를 지니게 되고 그것들이 겹겹이 쌓이면 나만의 아우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길을 계속하여 나아가다보면 나와 비슷한 아우라를 지닌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아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보자. 내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대로, 싫어하는 것은 좋아지도록 해보자. 우연과 우연, 아우라와 아우라가 만난 교차점에서 새로운 파동이 일렁인다.




우주 저 끝에 숨겨진 작은 다이얼이.. 달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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