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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낭 Feb 05. 2022

아까운 것들

구정날 제주도에 다녀오며

구정에는 제주도에 다녀왔다. 대학생이 되어 뭍으로 나가기 전까지 줄곧 살았던, 나와 어머니의 고향이다. 좋은 점보다 지긋지긋한 점이 더 많았기에 지금 이렇게 고향이 아닌 곳에 있는거지만, 좋은 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정확하게 몇 가지를 꼽아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어디로 향하든 간에 드라이브 중 차창 너머를 바라보면 바다가 넘실댄다는 것이다. 시내의 짧은 거리 이동에선 바다가 안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건너가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제주도 안에서는 산을 넘어 이동하거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낮은 건물과 밭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면, 바다가 보이지 않는 순간 숨을 멈추고 다시 바다가 보이는 순간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느슨하게 조절한다.


두번째는 제주어다. 같은 드라마 속 여성혐오여도 우리 것이라고 느껴지면 훨씬 역겨워져서 한국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어쩌다가 킨 tv속 드라마 혹은 광고에 제주어가 나온다 하면 일단 귀를 기울인다. "와, 저 사람은 토박이네", "저 사람은 노력 좀 했네", "지금 이런 뜻으로 말한거 맞지?", "여기다 자막을 왜 깔아?" 하면서 신이 난 채 동생과 온갖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 이 신남의 원인은 아마 지금 있는 곳 근방 몇km이내에는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나와 동생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온걸 수도 있고, 영상 속 제주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일 것(최소 3번은 넘어가지 않음)이라는 근거 있는 반가움일 수도 있고, 대학생 이후 내 입에서는 한 번도 자유롭게 나오지 못 했던 그리운 말들이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걸 들은 대리만족일지도 모른다.


제주어 중에 제일 좋아하는 말은 단연 '아꼽다'이다. '막 아꼽다', '아꼬와'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 동사는 가리키는 대상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귀애하게 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깝다', '아니꼽다'라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 말을 할때의 화자의 표정을 본다면 의도는 오해할 수가 없다. 일상적으로는 남발하지 않을 최상급의 애정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릴 적부터 간직한 소중한 물건이, 닳아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까워 침대 밑으로 몰래 밀어넣는 10대 후반의 아이를 상상하고는 한다. 한 번의 쓰다듬으로도 부서질까봐 다시 꺼내는 것도 주저하게 되어, '아깝다, 아까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마음. 어쩌면 아꼽다는 말은 표준어로 친다면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아깝다는 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멋대로 추측한다. 발음도 비슷하고.


약 3년 전부터 채식을 하고 있다. 이 지구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몫의 자원을 이미 많이 썼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사실 엄격하게 안 먹는 것은 덩어리 고기 뿐이고, 가끔씩 육수에 끓여낸 음식, 물살이를 비롯한 어패류, 유제품, 달걀 등은 먹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채식을 한 이후로 더 육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 어떤 음식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높은 열량을 주는 고기 한 조각이 얼마나 아까운 지를. 지금까지 얼마나 마구 먹어왔는지를. 또 가볍고 튼튼한 플라스틱이, 종이컵이, 반도체가, 석유가 얼마나 아까운 지에 대해 깨닫는다. 이렇게 고마운 것들이 한 번 쓰고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귀한 것들이 지구의 모든 사람 앞에 공평히 돌아가지 못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KBS에서 만든 다큐인사이트 <붉은 지구> 2 침묵의 바다 편에서는 현재 제주 주변 해역의 수온이 지난 36 동안 2 가량 올라, 아열대에서나   있는 해조류와 산호들이 뒤덮고 있는 제주 바다를 보여준다. 섬의 지리적 특성상 물이 부족한 제주에서 오랫동안 식수원이 되어준 지하수는 이제 귤농사에서 발생한 화학 비료와 농약으로 오염됐다고 한다. 지금 제주도에서는   시내 버스를 타더라도 2공항을 반드시 건설해야 하며 이로 인해 대규모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광고가 나온다. 아직도 누군가는 강정 해군 기지 건설과 비자림로 확장 공사에 반대하며 길거리에서 싸우고,  누군가는 하얗게 죽어가는 구상나무를 온실로 옮겨오고 있다.


설날을 맞이해서 고기를 넣지 않고 당근과 표고버섯으로 맛을 낸 떡국은 뭐가 빠졌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끔 그 자체로도 맛있었다. 만들고 남은 파의 초록 부분은 버리지 않고 채수 재료로 쓰기 위해서 냉동실에 넣어뒀고, 싹이 난 당근도 조금 도려내고 먹었다. 내 앞의 내 몫으로 받은 것들 하나하나를 아까워하고, 소중해하고, 다른 살아있는 것에게도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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