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날 제주도에 다녀오며
구정에는 제주도에 다녀왔다. 대학생이 되어 뭍으로 나가기 전까지 줄곧 살았던, 나와 어머니의 고향이다. 좋은 점보다 지긋지긋한 점이 더 많았기에 지금 이렇게 고향이 아닌 곳에 있는거지만, 좋은 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정확하게 몇 가지를 꼽아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어디로 향하든 간에 드라이브 중 차창 너머를 바라보면 바다가 넘실댄다는 것이다. 시내의 짧은 거리 이동에선 바다가 안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건너가고자 마음을 먹는다면 제주도 안에서는 산을 넘어 이동하거나,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낮은 건물과 밭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면, 바다가 보이지 않는 순간 숨을 멈추고 다시 바다가 보이는 순간 숨을 들이마시며 호흡을 느슨하게 조절한다.
두번째는 제주어다. 같은 드라마 속 여성혐오여도 우리 것이라고 느껴지면 훨씬 역겨워져서 한국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어쩌다가 킨 tv속 드라마 혹은 광고에 제주어가 나온다 하면 일단 귀를 기울인다. "와, 저 사람은 토박이네", "저 사람은 노력 좀 했네", "지금 이런 뜻으로 말한거 맞지?", "여기다 자막을 왜 깔아?" 하면서 신이 난 채 동생과 온갖 훈수를 두기 시작한다. 이 신남의 원인은 아마 지금 있는 곳 근방 몇km이내에는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나와 동생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온걸 수도 있고, 영상 속 제주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일 것(최소 3번은 넘어가지 않음)이라는 근거 있는 반가움일 수도 있고, 대학생 이후 내 입에서는 한 번도 자유롭게 나오지 못 했던 그리운 말들이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걸 들은 대리만족일지도 모른다.
제주어 중에 제일 좋아하는 말은 단연 '아꼽다'이다. '막 아꼽다', '아꼬와' 등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 동사는 가리키는 대상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귀애하게 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깝다', '아니꼽다'라는 말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 말을 할때의 화자의 표정을 본다면 의도는 오해할 수가 없다. 일상적으로는 남발하지 않을 최상급의 애정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어릴 적부터 간직한 소중한 물건이, 닳아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까워 침대 밑으로 몰래 밀어넣는 10대 후반의 아이를 상상하고는 한다. 한 번의 쓰다듬으로도 부서질까봐 다시 꺼내는 것도 주저하게 되어, '아깝다, 아까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마음. 어쩌면 아꼽다는 말은 표준어로 친다면 사랑한다는 말보다는 아깝다는 말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멋대로 추측한다. 발음도 비슷하고.
약 3년 전부터 채식을 하고 있다. 이 지구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몫의 자원을 이미 많이 썼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사실 엄격하게 안 먹는 것은 덩어리 고기 뿐이고, 가끔씩 육수에 끓여낸 음식, 물살이를 비롯한 어패류, 유제품, 달걀 등은 먹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채식을 한 이후로 더 육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그 어떤 음식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높은 열량을 주는 고기 한 조각이 얼마나 아까운 지를. 지금까지 얼마나 마구 먹어왔는지를. 또 가볍고 튼튼한 플라스틱이, 종이컵이, 반도체가, 석유가 얼마나 아까운 지에 대해 깨닫는다. 이렇게 고마운 것들이 한 번 쓰고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귀한 것들이 지구의 모든 사람 앞에 공평히 돌아가지 못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KBS에서 만든 다큐인사이트 <붉은 지구> 2편 침묵의 바다 편에서는 현재 제주 주변 해역의 수온이 지난 36년 동안 2도 가량 올라, 아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해조류와 산호들이 뒤덮고 있는 제주 바다를 보여준다. 섬의 지리적 특성상 물이 부족한 제주에서 오랫동안 식수원이 되어준 지하수는 이제 귤농사에서 발생한 화학 비료와 농약으로 오염됐다고 한다. 지금 제주도에서는 몇 번 시내 버스를 타더라도 제2공항을 반드시 건설해야 하며 이로 인해 대규모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는 광고가 나온다. 아직도 누군가는 강정 해군 기지 건설과 비자림로 확장 공사에 반대하며 길거리에서 싸우고, 또 누군가는 하얗게 죽어가는 구상나무를 온실로 옮겨오고 있다.
설날을 맞이해서 고기를 넣지 않고 당근과 표고버섯으로 맛을 낸 떡국은 뭐가 빠졌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끔 그 자체로도 맛있었다. 만들고 남은 파의 초록 부분은 버리지 않고 채수 재료로 쓰기 위해서 냉동실에 넣어뒀고, 싹이 난 당근도 조금 도려내고 먹었다. 내 앞의 내 몫으로 받은 것들 하나하나를 아까워하고, 소중해하고, 다른 살아있는 것에게도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