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모르던 철없던 어린 시절, 신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가족관계와 직업, 나의 특기와 장래희망을 적어 내는 조사서를 나눠주곤 했는데 나는 매번 장래희망을 적어내는 난에 현모양처라고 적었다.
종이를 채워나갈 때마다 특기와 장래희망난이 나오면 한참을 생각하게 했는데 특별히 갖고 있는 꿈도 없었고 현모양처는 참 평범하지만 꽤 괜찮은 느낌의 명사라는 생각에 적어낸 것 같다.
현모양처가 뜻하는 느낌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어느 날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뜻은 어진 어머니이자 착한 아내라는 뜻이었다. 결혼해서 착한 아내가 되고 아이들에게 어질지만 온유한 엄마가 되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철이 들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는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어릴 때 꿈꿨던 현모양처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꿈꿨던 커리어우먼은 생각보다 거리가 멀었다. 무언가 하나를 할 때마다 생각도 많고 꼼꼼한 편이라 남들과는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나에게는 두 가지를 병행하기에는 상당히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희생해서 누군가를 챙기고 보살핀다는 게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회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결혼이란 걸 생각하지 않게 됐다.
공무원인 언니는 가고자 하던 부서에 최종 합격하고 올해 초 가족을 서울에 남겨 두고 홀로 세종시로 내려갔다. 지원한 부서가 업무의 강도가 센 부서라 언니가 느끼는 부담감도 컸고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내려가게 되는 상황이라 걱정도 됐지만 독립(?)을 준비하는 언니의 모습은 왠지 홀가분해 보였다. 일벌레인 여자에게 챙겨야 할 가족이란 어쩌면 사회생활에서 넘지 못하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조건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유아기를 지나고 내 손길이 줄어들 만큼 많이 컸지만 이제는 신경을 쓰고 채워줘야 할 일들이 더 많아졌다. 이제는 각자 알아서 할 나이라고 내 관심과 시간을 내 꿈과 비전으로 옮기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시 내 꿈을 꾸고 실행하기에도 어쩌면 늦은 나이인데…', '남들보다 늦었으니 더 속도를 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다가도 나의 남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낼 아이들의 꿈을 응원해 주고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내 꿈의 속도를 늦춘다.
아니, 어쩌면 나는 내 아이를 낳은 순간 어릴 때 꿈꿨지만 잊고 있던 현모양처의 꿈을 조금씩 이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