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린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핀란드만 남부 해안에 있는 에스토니아에서 하루를 묵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도시에서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란 길 가다가 우연히 돌 틈에서 은전을 줍는 시간처럼 느껴져 횡재를 만난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잠시 산책하기 위해 호텔에서 나왔다. 호텔 반대편에 작은 조각 공원이 있었는데 공원 뒤쪽으로 울창한 숲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다. 숲속 거니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어서 빨리 숲속으로 들어가자며 넓은 도로를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섰다.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이 시렸다. 순간 ‘아! 탈린 하늘 정말 미쳤구나’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제 해질녁에도 하늘에 수를 놓던 새털구름이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끌어 올려주었는데 오늘 아침의 하늘빛은 청년의 싱싱한 눈빛이라고나 할까. 청량감을 뿜어내고 있는 파란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그 자리에 서 있고 싶었다.
오전 8시가 막 넘어가던 그 시간엔 깨끗한 물에 세수하고 나온 듯한 햇살마저도 무척이나 맑게 느껴졌다. 여행할 때 유명해진 장소에서 세월의 흔적이 남긴 것들을 바라볼 때도 좋지만, 나는 이렇게 가슴 저미게 파고드는 짧은 순간의 느낌이 때론 더 좋다. 환경과 자연이 어우러져 짧은 순간에 맛볼 수 있는 이런 느낌이야말로 명소에서 느끼는 감정보다 더 강렬하니까 말이다.
신호에 따라 맞은 편으로 길을 건넜다. 숲속에 서 있는 나무들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 크고 울창했다. 숲으로 들어가려는데 싱그러운 햇살이 나무 사이에 펼쳐진 풀밭 위로 그이와 내 다리를 5미터도 더 넘게 키워주었다. 키가 커진 그림자 샷을 찍으며 ‘어메 좋은 것’이라고 외쳤더니 그이가 웃었다.
북유럽 나라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키 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덴마크에는 세계 최장신들이 살고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길쭉길쭉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내 옆을 지나갈 때마다 ‘와 이 사람들 진짜 너무 크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가 죽었었는데 탈린의 숲속에서 우리가 롱다리가 되다니. 마치 롱다리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마법에 걸려 흡족한 기분으로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니 숲 중앙에 커다란 사과나무가 다섯 그루나 서 있었다. 가지마다 작고 빨간 사과를 가득 이고 있는 사과나무는 푸른 잔디밭 위로도 잘 익은 사과를 마구 떨어뜨려 놓아서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과일 중에 사과를 가장 좋아하는 나로선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세상에’라는 단어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탈린의 사과나무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꼬마 계집애처럼 좋아하는 나를 보던 그이가 "저 사과나무 우리 동네로 한 그루만 옮겨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중얼거렸다. 결혼할 때 나에게 평생 사과는 집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그이였으니 탈린의 자그만 동네 앞 숲속에 우람하게 서 있는 사과나무를 보며 어찌 우리 동네로 옮겨 오고 싶지 않았을까. 그이의 마음이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들처럼 빨갛게 물들어 보이는 순간이었다.
탈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이다. 우리나라의 반절 정도 되는 면적에 인구수가 43만 정도 되는 매력적인 국제도시라고 한다. 이렇게 인구수가 적다 보니 번잡한 시내라고 해도 사람이 붐비지 않고 도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90년대에 어렵게 독립을 했는데 현재는 디지털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구도심의 툼페아 언덕을 오르다 보면 13세기에 십자군 기사단에 의해 세워진 성채도시가 나온다. 유네스코에 진즉 등재되었다는 툼페아 언덕을 오를 때 걷던 작은 골몰길, 장엄한 돔을 가진 알렉산드로 넵스키 사원, 5개의 높은 첨탑으로 이루어진 성곽도시와 다양한 건축물들은 중세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알록달록한 집과 붉은 지붕이 동화 속처럼 아기자기하게 펼쳐진 탈린의 구시가지를 그이와 함께 두 바퀴나 삥 돌면서 아이들에게 줄 강아지, 물고기 모양의 나무 열쇠고리를 사서 주머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