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감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오해 때문은 아니었다.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몸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잘못된 출발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언제든 돌아설 수 있다는 생각이 발걸음을 밀었다.
밖으로 나서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8월 말, 새벽 4시 32분. 아파트 단지는 잠들어 있었다. 주차장 주변의 관상수와 잔디밭이 눌린 하늘 아래 또렷했다. 가로등 불빛에 젖은 나뭇잎이 번들거렸다. 비는 끊기지 않았다.
머릿속에 오래된 흑백영화가 스며들었다. 낡은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화면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필름이 삭아 생긴 비였다. 사람들은 젖지 않았고, 나는 그 안에서 늘 놀라고 물러서며 도망치는 쪽이었다. 그런 역할이라면 나는 적합할지 몰랐다. 보는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배우. 끝내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있을 것이다. 혼자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처음 가는 길인데 낯설지 않을 때가 있다. 한 번 지나온 것 같은 느낌. 착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녀를 봤을 때 그랬다. 맞지 않는 열쇠를 억지로 밀어 넣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말을 걸었다.
"우리, 언젠가 한 번 만난 적 있죠."
그녀의 눈에서 빛이 튀었다. 짧고 방향 없는 빛이었다.
"맞아요. 금성이었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가볍게 웃었고, 나는 따라 웃었다.
"엄청 많은 시간이 흘렀군요?"
이른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녀는 몇 마디를 건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진과 하얀 티, 파란 머리끈으로 묶은 머리. 말은 길지 않았고 우리는 조반을 같이 들었다.
"이런 곳에 혼자 오시다니."
"가끔 와요. 넓잖아요."
그 말이 남았다.
장마가 풀리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 내려왔다. 여름이면 한 번쯤 바다를 보러 온다.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 고마웠어요. 그럼 다음에."
그녀는 먼저 일어났고, 나는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미 보이지 않았다. 담배를 물었고, 말은 남지 않고 장면만 남아 있었다. 나는 모래사장으로 걸어갔다.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먹물이 번진 것 같은 색이었다. 파도가 높아져 있었고, 이빨을 드러낸 짐승처럼 사람들을 밀어냈다. 확성기 소리가 공기를 쳤고 번개가 간간이 갈라졌다. 나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몸이 먼저 멈추려 하고 있었고,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여관으로 돌아와 양치를 세 번 했다. 면도를 두 번 했다. 담배를 열일곱 개비 폈다. 다섯 시간 사십일 분을 잤다.
깨어났을 때도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오후 7시 10분 전이었다. 거리는 비어 있었고 이곳 사람들만 드문드문 보였다. 나는 떠나기로 했고, 가기 전에 바다를 한 번 더 보기로 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우산이 몇 번이나 뒤집혔다.
해변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 비바람 속에서 우산도 없이 서 있는 사람. 그녀였다.
아침의 차림이 아니었다. 하얀 원피스가 물에 젖어 몸에 붙어 있었다. 나는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고 우산을 씌운 뒤 팔을 잡아 이끌었다. 그녀는 아무 저항 없이 따라왔다.
눈이 흐려져 있었고 동공이 크게 열려 있었다. 같은 얼굴인데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수건을 건넸고 그녀는 목례를 한 뒤 몸을 닦았다.
"그러고 싶었어요. 몸을 내맡기는 느낌, 아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하고 나서 처음 든 게 당혹감이었어요. 계속 예전이 떠올랐어요."
말은 길지 않았고 나는 그저 듣고 있었다.
"자고 싶어요. 여기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옷을 내주었다. 그녀는 금방 잠들었다. 숨이 고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목이 조여왔다. 숨이 막혔고 나는 눈을 떴다.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타 있었고, 눈동자에는 푸른 기운이 서려 있었다. 두 손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지만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단순히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붙들린 것처럼, 안쪽에서 묶인 것처럼 움직임이 막혀 있었다.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고 있었고, 그 소리는 점점 또렷해지다가 다시 멀어졌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하얀빛이 펼쳐졌고, 나는 긴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몸은 가벼웠고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끝이 보였고 그 너머는 푸른빛이었다.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몸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길고 어두운 것들이 뒤틀리며 흘러나왔다. 빠져나갈수록 몸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 흐려지고 있었다. 물이 출렁였고, 내 몸은 점점 옅어졌다. 형체가 희미해졌다.
앞에 문이 하나 서 있었다. 닫혀 있었고, 나는 그 앞에 멈춰 섰다. 그 순간 의식이 끊겼다.
눈을 떴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 시계가 들어왔다. 오후 7시 10분 전이었다.
나는 욕실로 가서 물을 틀었다. 거울을 보았다. 목에 시퍼런 손자국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