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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제(始山祭)

by 이각형 Mar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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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관악산을 2시간 만에 다녀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몸도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거의 자신을 상대로 지지 않겠다고 각오한 채 몸을 움직여 봤지만 쉽지는 않았다.



올해로 벌써 산을 타기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났다. 2015년 11월에 아버지를 따라 다녀온 날부터 시작하면 횟수로는 십일 년째가 되는 셈이다.



겨울에는 눈꽃산행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다니긴 했지만 춥고 위험하다며 거의 산행을 쉬곤 했었다. 그러다 매년 날씨가 조금 따듯해지는 삼일절에 내 나름대로의 시산제를 지내곤 했다.



그러던 것이 올해 삼일절엔 독감 증세로 삼일 연휴를 내내 앓아 누워버려서 일주일 정도 늦어졌다. 일주일 늦어졌으면 또 어떠랴.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 길인 것을.



지난주보다 기온이 소폭 오른 탓인지 산 입구에서부터 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빠른 걸음으로 생면부지의 산우들 사이를 헤집고 나아갔다.



얼굴을 모른다고 해서 산우가 아니겠는가. 그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면 산우인 것이다.



보통 이때 몸이 풀리곤 하는데 독감의 여운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몸이 무거웠다. 애를 써봐도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렇게 20분도 지나지 않아 오늘 산행은 상당히 고전할 거라는 직감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 호흡도 호흡이지만 발목을 지탱하는 근육이 약해진 탓에 돌길을 밟을 때 발목이 휙휙 꺾이거나 비스듬한 돌의 표면에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거기에 경사까지 조금씩 높아지자 허벅지 근력이 부족하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 또한 기립근까지 약해졌는지 자꾸 상체가 숙여지곤 했다.



겨우내 몸 관리를 등한시했다는 반증이었다. 역시 쉴 때는 달콤한 휴식에 몸을 맡기느라 몰랐지만 이렇게 자연에 나와 몸을 부딪히는 일에 직면할 때 그동안 얼마나 나태한 삶을 살아왔는지 여실히 깨닫게 된다.



날씨가 따듯해서 아이젠은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고도 400미터쯤 되었을 때 앞서가던 한 무리의 인파가 오도 가도 못한 채 제자리에 묶여 있자 지친 몸으로 비좁은 틈을 비집고 나아갔더니 아직도 녹지 않은 눈길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등산가방에 장갑과 아이젠은 반드시 챙기곤 했었다. 4월 중순이 지나서야 가방에 있던 아이젠을 꺼내곤 했다.



몇 해 전 4월 초 연주대에서 내려오다가 얼마 가지 않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봤더니 운동화차림의 수십 명의 젊은 산우들이 네 발로 내리막길을 기어내려가고 있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길이 아주 꽝꽝 얼어 있었다.



4월 초에도 산 위에는 빙판길이 깔려 있을 때가 간혹 있다. 그래서 네 발로 기어내려가는 산우들 사이를 아이젠을 끼고 혼자 금속성 소음을 내며 두 다리로 내려가자 마치 아이언맨이라도 된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최근 일주일 동안 날씨가 좋았기 때문에 이런 빙판길은 없을 줄 알았지만, 느닷없이 나타난 빙판길이 고도 400미터가 넘어가면서부터 운동화 차림의 등산객들의  발목을 붙잡아버렸다. 햇살이라도 자주 드는 곳이었다면 쌓였던 눈이 녹아 진흙탕길이라도 되었을 텐데 그곳은 햇살이 전혀 내리쬐지 않는 음지였다.



그래도 릿지화와 같은 접지력의 등산화를 신었다면 툭 튀어나온 돌머리를 밟고서 간다면 미끄러지지 않고 잘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체력도 어느 정도 소진한 상태였지만 어차피 빠른 속도를 낼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덕분인지 몰라도 첫 번째 관문까지 보통 55분 걸렸었는데 오늘 53분 만에 올라왔다. 시계를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대신에 평소보다 너무 지친 나머지 물 반통을 한 번에 마셔버렸고 거친 호흡을 달래느라 5분 정도를 앉아 있어야만 했다. 이제 연주대까지 대략 500미터 정도가 남았지만 대략 700개쯤 되는 계단이 연속해서 이어지는 구간이 남아 있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지금까지도 상당한 체력을 소모했는데 이제 남은 구간이 노른자위 같은 곳이라 살짝 현기증이 나기도 했다.



그래도 쉬지 않고 천천히라도 걸어간다면 그리 늦지는 않으리라. 이런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간신히 정상에 도착해서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결과를 보니 평소보다 3분이 더 걸렸다. 그리고 체력 소모는 훨씬 더 컸다.



아니 정확히는 남은 체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상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중턱에 자리를 잡고 믹스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몸이 굉장히 불편하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통증인데 올라오느라 너무 고생한 탓에 무릎에 피로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내려가는 도중에 감지된 것도 아니고 다 올라온 뒤 정상에서 쉬고 있는 마당에 무릎이 쑤시고 아프다니, 이런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운동을 쉬었길래 이 정도로 나약해졌다니, 약골이 되어버린 몸에 자조 섞인 원망이 들고 말았다.



문득 내려갈 때에도 근력이 부족해 위험할 수 있겠구나, 아니 적어도 상당히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산제를 지내는 날은 역시 근력의 문제가 대두하곤 했다.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부드럽게 넘기고 개인정비를 마친 뒤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예상한 대로 약간 불안정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그래도 익숙한 지형이고 눈에 훤한 길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잘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아까 올라올 때 사람들의 발길을 막아세웠던 빙판길 구간이 나타났지만 대수롭지 않게 아이젠이 없이도 잘 내려올 수 있었다.



대충 이십 분쯤 잘 내려온 탓에 방심했는지 갑자기 왼쪽 발에 힘이 풀리면서 돌부리에 차이더니 급속도로 상체가 지면으로 끌어당겨졌다. 역시 중력은 만인에게 평등한 잔인한 것이다.



넘어지는 소리가 나서 그런지 방금 지나쳤던 젊은 친구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왜 그래?"라는 말을 산속에 울려 퍼지도록 크게 말했다. 그 말이 들려올 쯤엔 나도 벌떡 일어나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손을 털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넘어질 때 땅을 디뎠던 왼손 엄지 쪽 손바닥에서 꽤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바닥 근육이 좀 놀랐는지 경련도 살짝 일곤 했다.



그리고 손목에 평소보다 강한 긴장감이 느껴져서 불편했다. 오른손으로 왼손 엄지를 잡고 손목 쪽으로 90도로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둔통이 느껴졌다.



단순한 타박상이긴 해도 통증은 며칠 정도 이어질 것만 같았다. 역시 근력, 코어근육이 부실해진 탓에 몸에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한 탓이다.


집에 와서도 이 글을 쓰는 동안 손이 꽤 불편하다. 설거지할 때에도 무거운 그릇이나 컵을 들고 있으면 통증 때문에 힘들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몸이 아프면 마음 아픈 게 덜하니까.




이때부터 내려오면서 머릿속으로는 플랭크부터 시작해서 스쿼트와 브리지 등 코어근육을 단련시키는 운동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게을러진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을 텐데, 잃어버렸던 운동의 관성 법칙을 되찾을 때까지 나 자신에게 꽤 압박을 가해야겠구나라는 반성까지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소파와 친했었고 그동안 너무 빅뱅이론에 빠져들어 있었다. 이제 다시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처럼 산속을 뛰어다닐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야 할 때가 왔다.



그동안 너무 약해졌다. 몸도 마음도.



2025년의 시산제는 대차게 넘어진 것으로 대신한 셈이다. 고생했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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