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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22. 2023

나쓰메 소세키를 기리며



나는 좀처럼 계획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워낙 게으른 천성도 한몫하지만, 글이란 건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써야 제맛이지 향후 16주의 일정을 미리 정한 강의계획서처럼 사전에 어떤 글을 쓰겠다고 공표하는 일은 나와는 맞지가 않다.

이런 천성과 생각 덕분에 브런치에서도 작가 응모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최소 10편의 글을 어떤 얼개로 엮을지 기획한 뒤에 응모를 해야 하는데 부족한 글쓰기 실력도 실력이지만, 응모의 최소 건인 기획하는 일조차 민첩성이라든가 명민함이 상당히 부족해 난망하기만 하다.

이런 나의 고질병은 과거 경험에서도 드러난 적이 있다. 8년 전이었던가, 어떤 사람이 심심하다고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만 백지를 앞에 두고 몇 시간 만에 코를 박고 말았다.

나는 이러한 일들이 내가 작가를 소망하기는 하지만 작가로서의 부족한 자질이라고 여기곤 했다. 재능도 부족한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하니 아무리 숨어 있는 잠재력이 있다한들 뭔가를 일궈낼 게재가 없다고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어떤 철학자의 글을 읽었는데 나와 같은 얘기를 100년 전에 이미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좀처럼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구어체든 문어체든 관계없이 그런 표현은 마치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있다는 전제 하에 자신을 그러한 집단의 한 사람으로 당당히 소개하는 둥 약간 으스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계획적으로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묘사는 거들먹거리는 어감이 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방바닥에 철퍼덕 누워 심드렁한 표정으로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는 한량을 떠올리게 해 안심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쓰메 소세키를 앙망하기를 전혀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나는 문학적 민족주의 노선에서 탈피한 지가 이미 수년이 흘렀던 덕분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프루스트에게 진 빚이 상당하다.)

물론 한때 나는 대한의 남아로서 일황에 대한 충성심에 몰입했던 열도에 항거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토록 앙망하기를 그치지 않는 소세키에조차 적개심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라는 작품에 대한 토론장에서 인간의 도리를 다루었다는 얘기를 듣고 과연 한반도를 처참히 몰수한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고 과격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외로 출장길을 나설 때 공항 서점에서 소세키의 "그 후"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 뒤부터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이토록 섬세한 붓길이 그려낸 작품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시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로 번역해 놓으면 한국 시 특유의 청아한 시적 감수성이 사라진다는 데에 있다곤 하는데, 소세키의 문학작품 역시 이미 100년 전에 그러한 운명을 겪은 셈이었다.

시를 제외하고선 우리나라 문학을 모두 압축한다고 해도 소세키의 문학적 감성을 쫓아갈 리 만무할 정도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천상 작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글로 그림을 그리는 소세키에 비한다면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재담꾼에 불과하다. 그만큼 소세키는 차원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일부 그의 글을 발췌해 보자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었던 "풀베개"에서 동백꽃을 묘사한 장면을 인용하고 싶다. 사실 나는 5년 전에 제주에서 동백꽃을 육안으로 처음 봤었는데 첫인상이 매우 음침했었다.

어둡고 진한 빨간잎이 오히려 아주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도 모자라, 꽃잎을 받치고 있던 초록의 이파리도 보통보다 두툼한 데다가 영롱한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탁하고 진한 초록색이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지하동굴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이러한 동백꽃의 인상은 특히 꽃잎과 이파리가 흐트러지지 않고 한꺼번에 툭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때 분명했었다. 동백나무 아래에 듬성듬성 떨어져 있던 동백꽃을 보는 동안 소름 돋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동백꽃을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동백 잎은 녹색이 너무 진해서 낮에 봐도, 양지에서 봐도 경쾌한 느낌이 없다. 특히 이 동백나무는 바위 모서리에서 안쪽으로 5미터쯤 들어간 곳에, 꽃이 없다면 뭐가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곳에 고요히 자리 잡고 있다. 그 꽃이! 하루 종일 헤아려도 물론 다 헤어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눈에 띄면 반드시 헤아리고 싶어질 만큼 선명하다. 그저 선명하기만 할 뿐 전혀 밝은 느낌이 없다.

확 불타는 듯해서 무심코 마음을 빼앗기고, 그다음에는 어쩐지 황량해진다. 그것만큼 사람을 속이는 꽃은 없다. 나는 깊은 산속의 동백을 볼 때마다 늘 요녀의 모습을 연상한다. 검은 눈으로 사람을 낚아채고 아무도 모르게 요염한 독을 혈관에 불어넣는다.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다. 건너편 동백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아,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다.

저 꽃의 빛깔은 단순한 빨강이 아니다. 눈을 번쩍 뜨게 할 만큼의 화려함 속에 말로 할 수 없는 차분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초연하게 시들어가는 빗속의 배꽃을 보면 그저 가련한 느낌이 든다. 차갑고 요염한 달빛 아래의 해당화를 보면 그저 사랑스러운 마음이 인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동백과는 전혀 다르다. 거무스름하니 독기가 있는, 어쩐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를 속에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에게 아양을 떠는 모습도 없고, 특히 사람을 부르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확 피었다가 툭 지고, 툭 졌다가 확 피고, 수백 년의 성상(星霜)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산그늘에서 태연자약하게 살고 있다. 단 한 번 보기만 하면 그걸로 끝! 본 사람은 그녀의 마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 빛깔은 단순한 빨강이 아니다. 도륙된 죄수의 피가 저절로 사람의 눈을 끌어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듯한, 일종의 이상한 빨강이다. 보고 있으니 빨간 것이 물 위로 뚝 떨어졌다. 고요한 봄에 움직인 것은 그저 이 한 송이뿐이다. 잠시 후 다시 뚝 떨어졌다. 저 꽃은 결코 지지 않는다.

무너진다기보다는 단단히 뭉친 채 가지를 떠난다. 가지를 떠날 때는 한 번에 떠나기 때문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져도 뭉쳐 있는 것은 어쩐지 독살스럽다. 또 뚝 떨어진다. 저렇게 떨어지는 동안 연못의 물이 붉어지리라 생각했다.

꽃이 조용히 떠 있는 근처는 지금도 약간 붉은 듯하다. 또 떨어졌다. 땅 위에 떨어진 건지, 물 위에 떨어진 건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조용히 뜬다. 또 떨어진다. 저것이 가라앉는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해마다 남김없이 떨어지는 수만 송이의 동백꽃은 물에 잠겨 빛깔이 풀리기 시작하고 썩어 진흙이 되고, 이윽고 밑바닥에 가라앉는 것일까." -풀베개 P136, 현암사

인생의 철학적 의미를 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다채로운 삶의 차원을 다루고 있다. 인물이나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에서 작가의 예술가적 관점이 작품에서 물씬 흘러나와 내 가슴속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이 될 12월 독서토론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하니 어찌 그를 그리워하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저 나의 감상에만 집중할 뿐이다.

12월에 만나게 될 작품은 "도련님"이라는 작품으로 아주 간결한 문체가 돋보이는 읽기 편한 소설이다. 소세키 작품 세계의 정수를 맛보기 위해서라면  "도련님"으로는 어림도 없다.

소세키 작가와 두 눈을 마주보기 위해서라면 단연코 그의 작품 중에서 우미인초, 행인, 풀베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세 권 중에서도 단 한 권만 고르라고 하면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우미인초를 꼽는다.

이토록 그를 닮고자 했던 만큼 존경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분석할 능력 따위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의 감상을 소화하기에도 힘에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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