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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Dec 22. 2023

혹독한 추위 속에 떠나는 외근

환승통로에서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최저기온에 한낮에도 기온이 올라 봐야 기껏해야 영하 8도에 머물러 있는 혹독한 겨울날이다. 사실 이렇게 추워지기까지 12월은 상당히 따듯했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봄꽃이 피어나는 이상기온현상과 같은 장면이 며칠째 이어졌었다. 덕분에 옷이 가벼웠고 출퇴근 길 위에서의 마음도 홀가분했다.



그러다 여름 장마 같은 호우가 며칠째 이어지더니 어느새 한파가 한반도를 몰아쳤다. 한파가 몰아치기 전, 예상기온이 영하 15도에 체감기온은 영하 20도를 기록할 것이라는 예보를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좀처럼 겨울 추위를 싫어했었지만 한겨울을 적도지방 근처에서 지내느라 사계절이 아닌 삼계절로 1년을 보내고 난 뒤로는 겨울이 몹시도 그리웠다. 그것도 매섭고 차디찬 겨울이 말이다.



특히 엄동설한에 중무장을 하고 상고대를 보겠다고 소백산이니 오대산이니 이산 저산을 오르내렸을 때의 고생이 어느새 세월의 풍파를 거쳐 애틋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덕분에 체감기온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날이 되면 코끝이 시리고 속눈썹에 고드름이 맺힌 눈을 비비대며 산길떠올리는 등 추억놀이에 여념이 없어질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사무실의 최상위직급 직원이 휴가를 떠난 금요일 오후, 다시 말해 어린이날과도 같은 이런 날에 세상을 꽁꽁 얼려 버린 안개 같은 추위를 뚫고 외근을 가야 하는 일은 한사코 마다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는 서민의 애환과 언제나 동행하는 추위와 허기의 서러움이 숙명처럼 따라붙어 우리를 가만 놓아두질 않는 법이다.



가방에 서류를 챙겨 어깨에 대충 둘러매고는 지하철역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강추위만 아니었다면 걸어서 15분이면 족히 도착할 만한 거리였다.



걷는 걸 좋아하지만 이런 날씨엔 부득불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한 블록 남쪽에 떨어져 있는 사무실로 상호감사를 하러 다녀오는 그 짧은 시간에 온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상호감사를 하는 사십여 분 동안에도 한기는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았고 감사를 마치고 다시 원래의 사무실로 복귀하는 동안 다시 한기를 총총 휘둘러 감아버리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서도 발끝에서 빠져나가지 않던 한기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혹독한 추위였다.



그러니 선릉역까지 외근을 다녀오는 길이 아무리 걸어서 편도 15분 만에 갈 수 있다고 해도 걸어갈 리 만무하다. 선릉역을 빠져나와 방문할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부동산 갑부의 사무실이라 그런지 의리의리했다. 혼자 쓰는 사무실이었는데 족히 100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공간을 홀로 독차지하고 있었다.



선정릉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유리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이 탁 트인 탓에 방에 들어서자마자 속 시원한 느낌에 어느새 가슴을 끌어내리는 감성의 중력이 힘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방에 들어서서 회장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인사를 드리자마자 영화 더록에서 테러리스트의 리더를 맡았던 배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군인과 같은 굳은 표정을 수십 년째 지니고 살았는지 굳게 다문 입술 위로 얼굴 전체가 굳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추위를 뚫고  나를 환대하려는 밝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서류 작성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도장을 찍고 몇 글자를 종이 위에 그려낸 다음 서명과 날인이 누락된 곳이 없는지 살펴본 뒤 방을 나섰다.



이렇게 간단한 일인데도 사무실을 나서기를 망설였었다니 한겨울을 대비하지 않았던 베짱이처럼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빌딩을 나섰을 때 길거리에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휩쓸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단순히 반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수인분당선을 타고 다시 9호선으로 갈아타려고 환승구역을 통과하고 있었을 때였다.



낯선 얼굴색의 이방인 두 사람이 환승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서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는 비킬 줄은 모른 채 손을 잡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멀리서 봐도 서로가 서로를 놓지 못한 채 미소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는 많아 봐야 30대 초반으로 보였던 두 남자는 이국땅에서 반가운 고향 친구를 우연히 환승통로에서 만난 것이었다. 그토록 서로를 반가워하는 친구사이라니.



하기사 동유럽인이었던 두 사람에겐 이국땅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서로에게 포개질 수 있는 유일한 가슴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지만 난 그 두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동성 간의 우정이 이토록 아름답게 펼쳐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동정과 동시에 부러움이 피어났다.



그러다 슬며시 내게는 그토록 반가운 이가 누굴까라는 생각에 손길이 미쳤다. 가족이 아닌 사람 중에 나를 이토록 반가워할 사람이 누구일지.



그 녀석도 물론 저 멀리 이국땅에서 가정을 이루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그 녀석일 것이다. 인간적인 관계에서만큼은 그 녀석만이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바람을 가슴속에 품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라도 나라는 존재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고 위로해 줄 그분이 언제나 내 곁에, 내 마음속에 거주하시길 바라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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