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를 정립시켜 주는 것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최초의 인식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쉽사리 믿으려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최초의 자아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시기가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몇 달간 생면부지의 친척집을 떠돌던 7살의 어린아이의 의문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나의 최초의 어둡고도 고통스럽고, 충격스러운 그 기억은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의 문을 두드려주었다. 고통과 외로움과 슬픔은 나의 존재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그 이후에는 좌절과 포기, 결국에는 자기 체념으로 이어졌다. 몇 달간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우울감이 가득 채워졌다가 문득 내면 깊은 곳에서 '과연 나는 누구일까? 어디에서 왔을까?'라는 인간 본질에 관한 질문이 솟아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때와 시기는 달라도 이 질문 앞에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내게는 부모의 이혼이라는 사건으로 남들보다 조금 일찍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변에 존재하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찾을 수 없었다. 물어볼 수도, 답을 들을 수도 없는 인간의 근본적이면서도 너무나 원초적인 질문이라 7살 이후로 지금까지 가끔씩 이 질문의 무게 앞에서 가만히 멈추어 서있곤 한다.
혼자서 울고 있던 7살의 어린 소년의 고뇌는 이제 7살의 딸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된 다 자란 어른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왔다.
나의 딸아이는 내가 7살에 가졌던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크지는 않지만 여름철에는 시원한 에어컨을 마음껏 틀 수 있고, 추운 겨울에는 한기를 막아주고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 수 있는 집이 있고,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조금의 여유가 있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나의 딸아이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고통과 슬픔과 아픔 앞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뇌에 쉽게 빠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현자와 평인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찾아온다. 현자는 평범하고도 안정된 삶의 찰나에서 이러한 고뇌의 실을 찾아 자신의 사고와 지성의 바늘 끝에 꾀어 찰 수 있으나 평인은 일상적인 삶의 시간 속에서 이러한 고뇌를 하기는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 사십에 가까운 어색한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7살의 그 어린 시절에 최초로 품었던 그 의문을 가진 채 고뇌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떠한 대는 그 의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찾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이 정말로 확실한가에 대한 물음을 던질 때가 있다. 이러한 의문과 질문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넷플릭스 속 포켓몬스터에 빠져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울기도 했다가 웃기도 하는 딸아이의 순수한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내 아이에게만은 내가 7살에 가졌던 그러한 불행한 기억과 이러한 무겁고도 진중한 의문은 가지지 않게 하고 싶은 게 딸 가진 아빠의 마음인 것 같다.
나는 이제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한 줄은 '7살 딸아이의 아빠이다.'로 채울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나의 존재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이유와 목적을 채우기 위해 나는 이 하루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자존감이 무너진 순간에 찾아온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끝없이 나를 더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