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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내가 한 디자인은 받는이를 모르는 편지와 같았다

디자이너서 비즈니스 파트너로 포지셔닝 하기

by LANLAN 란란

시리즈 : 디자인만 하지 않는 디자이너 ② - 데이터 읽는 디자이너



"그동안 내 회사라고 생각하며 디자인 했지만 정작 그 디자인의 주인공을 몰랐다. 무려 5년간."


취업도 미룬 채 공부하다 보니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내가 5년간 '내 회사'라고 생각하며 디자인 한 우리 서비스의 홈페이지, 상품 페이지, 이벤트 배너들이 누구를 위한 건지,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혼자 있었는데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손으로 가려버렸다.

나는 그 서비스의 사용자가 누구인지도 정의할 수 없었고 사용자의 특징도 전혀 모르는 상태였던 거다. 무려 5년간.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굴 위해 무엇을 만들고 있었던 걸까? 어딜 보고 열심히 했던 걸까?


창업 멤버였다는 자부심은 금세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비즈니스를 이해하려면 시장의 원리를 알아야 했고, 시장을 이해하려면 고객을 이해해야 했다.

모든 건 이어져 있었다. 디자인, 비즈니스, 데이터. 나는 그동안 그 연결고리 중 무엇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빨리, 크게 성장하고 싶었다. 내 안에서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뒤섞이며 성장 욕구가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그때의 내가 이런 지식이 있는 디자이너였다면 회사의 결과가 달라졌을까?'

'우리는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나는 사무실로 이사 가지 않았을까?'

'큰 회사에 엑싯을 했을 때 나 역시 필요한 사람으로서 그곳에 남을 수 있었을까?'


공부 좀 한다고 내가 회사의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님에도 자꾸 자문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회사의 마케팅팀장이 회의 시간에 한 말 때문이었다.


그는 늘 과거의 방식을 반복했다. 브랜드와 상관 없이 화제성 이벤트만 열었고 나는 그 방식이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로스 해킹'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검색해 보니 데이터로 의사결정을 하고 그로 인해 서비스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는 거라고 했다. 우리 마케팅 방식과 거리가 먼 것 같아 회의 시간에 그에게 물어봤다.


“팀장님, 마케팅 하실때 고객 데이터로 분석하고 계신가요?"


그러자 그는 말했다.


“데이터는 정확하지 않아요. 오히려 보면 잘못된 결정을 할 수 있어요."


창업자도 그 말에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속으로 ‘그럴 리가 없잖아’ 했지만 아는 게 없으니 입을 다물었다. 아니, 오히려 한편으로는 '그런가..?'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공부 하면 할 수록 그 팀장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반드시 데이터로 의사결정 하는 스타트업에 들어가겠다. 웹디자이너가 아닌 UX/UI 디자이너로'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UX/UI 디자인의 개념도 잘 모른다는 점과 데이터를 활용할 줄 모른다는 점, 그리고 나를 소개할 포트폴리오도 없다는 점이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넘나들며 IT, UX, UI, 모바일, 데이터 관련 책을 눈에 띄는 대로 읽고 각종 강의도 들었다.


너무 몰랐던 탓일까. 더블 다이아몬드, 페르소나, 유저 저니 맵, 네이티브 앱, 디자인 시스템, 퍼널, 코호트, SQL… 이게 다 어느 나라 말인가 싶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책을 보고, 낮에는 라우드 소싱이라는 디자인 콘테스트 플랫폼에 올라오는 각종 앱 디자인 의뢰에 지원했다. 그렇게 공부와 포트폴리오를 만들기를 병행해 1년 만에 스타트업에 합격했다. 연봉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배울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기뻤다.


일하면서 더 많은 게 보이니 갈증은 더 심해졌다. 사용자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다. 그들이 남긴 데이터를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회사는 그럴 여건이 안 됐다. 그래서 또 옮겼다. 이번엔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해준 곳으로 갔다. 이번에도 연봉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배우는 게 훨씬 많았기에 만족스러웠다.


도메인 분석, GA4 데이터 세팅과 분석, 사용자 인터뷰, 고객 분석, 마케팅 전략, 새로운 브랜딩, 운영 정책까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새워 공부하고 각종 전략을 짜서 가져갈 정도로 열정적이고 주도적으로 일하며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는 나에게 마케팅 팀장을 제안했다. 그때 처음, '아, 나 잘하고 있었구나' 라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내가 마케팅 팀장을 할 깜냥은 안되어 거절했다.


이후 6개의 스타트업에 더 다니며 알게 됐다. 디자이너가 데이터를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데이터는 프로젝트와 시장에 대한 배경 지식이 깔려 있어야 수집하고 활용할 수 있다. 더불어 이 UX/UI 디자인이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예상할 수 있어야 설정하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앞단의 사전 배경 지식은 디자이너에게 잘 넘어오지 않는다. 넘어와도 파편적이거나 기획자의 의도에 일부 섞여서 온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데이터를 본들 이해될리가 없었다. 또는 데이터를 아예 볼 수조차 없는 경우도 많으니 무력감을 느끼는건 너무 당연했다.


디자이너가 데이터를 읽고 비즈니스를 이해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창업자도 모르고 기획자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 본인조차도 모른다. 이건 디자이너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에서 오는 한계와 문제였다. 냉정히 말해서 그 한계를 바꿀수는 없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환경을 직접 바꿀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회사를 퇴사하고 ‘77번가의 다크호스들’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자를 내고 란란클래스를 본격 운영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데이터 읽는 디자이너 되기' 수업에서 디자이너가 본인이 데이터를 읽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느끼게 만들고 있다.


그때 그 회의실에서 마케팅 팀장이 했던 말 처럼 데이터는 정확하지 않은게 맞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데이터를 볼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은 아니다. 디자이너가 데이터를 읽고 활용해야 정말 사용자를 위한 UX를 설계하고 이를 비즈니스 목표와도 연결할 수 있다.


"그때 내가 지금 알고 있는걸 알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스스로에게 다시 되물어본다. 결과는 나 혼자 만드는게 아니니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그 회의실에서 입을 다물진 않았을 것이다. 고객 데이터를 확보해 분석하고 사용자를 만나서 원하는 것을 파악하여 세그먼트를 나눠 UX를 설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협업을 제안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디자인만 하지 않는다. 사용자 데이터도 읽으며 프로덕트를 설계한다.


<다음 편은 ‘디자인만 하지 않는 디자이너 ③ - 커뮤니케이션 공부하는 디자이너’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때의 저와 같은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면.


'란란클래스'에서 고민을 털어놔보세요. 때로는 나의 고민을, 자신과 같은 고민을 이미 한 번 푼 사람에게 말하기만 해도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하니까요.


lanlanclass.com




이 글은 '디디디님이 운영하는 My Threads Insight - 월간 스레드 3호'에 올라간 글입니다.


https://mythreadsinsight.com/monthly-threads/20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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