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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봄 Feb 28. 2024

김봄의 연극을 봄/ 역사시비 프로젝트 <수치심>

2024년 월간 역사시비 프로젝트 - 1월 - 윤한솔 연출 <수치심>

이것은 연극이다.


202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중장기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가 있다. 극단 그린피그가 제작하는 ‘2024년 월간 역사시비’가 바로 그것이다. 12개의 타이틀, 12개의 작품이 매 달 관객을 찾아간다. 그 첫 시작은 윤한솔 연출의 <수치심>이었다. 1월 12일부터 21일까지 상연했는데, 잘 보고 와서 꼭 몇 마디 쓰리라 메모를 해두었지만, 밀린 원고가 너무 많았던 지라 일에 밀려 이제야 연극을 본 감상을 적는다. 매 달마다 이어질 새로운 역사시비에 응원을 보태는 마음을 담아, 늦었지만 리뷰를 남기려고 한다.



이것은 연극이다

내가 가장 의미 있게 보았던 것은 배우들의 말하기 형식과 무대였다. 그것은 연극의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그 기본에 충실하게, 적확하게 무대를 장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작년에 본 몇 편의 작품들 중에는 영상과 결합한 장르융합 형식을 새로운 시도라는 식의 수식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글쎄 관객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매몰되어 오히려 너무나 상식적이고 진부한 무대가 연출되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윤한솔 연출의 무대는 연극의 서사와 배우들의 발화가 왜 이 무대 위에서 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주관을 수용하게 만든다.

그래서 무대를 보고 설득당한 관객이라면 더 깊이, 더 폭넓게 작품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무대라는 실황을 재현의 장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현실태로 인식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수치심>은 관객의 위치가 발견되는 연극이 된다.


연극은 역시 무대로 환원되는 세상이며, 무대라는 세상 속에 관객 역시 상존해야 한다. 무대 건너편에 앉은 관객들은 배우들을 목도하는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연극이라는 하나의 예술 장르 안에서 스며들어야 한다. 저만큼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어 안전하게 관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무대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연극은 하나의 총체성을 가지게 되고, 비로소 완성된다.


연극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나는 내가 관객으로서 연극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느끼면서 연극을 보고 왔다. 단순히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핍진한 스토리텔링 바깥고리에 있던 내가 그 이야기 속으로 문을 열어 들어간 것처럼 그 실제의 사건을 더 생생하고 신랄하게 '목격'하고 온 것이다.



생존의 법칙 - 수치침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인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난감함이나 당혹감과 같은 유사 감정들보다 더 강렬하다. 한스 페터 뒤르의 따르면 비더마이어 시대에는 음전한 여성에게 목욕을 하기 전 욕조에 톱밥을 뿌리게 했다고 한다. 톱밥으로 가슴과 음부가 노출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우리 내면에 이미 잠재적인 타인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소셜 테트워크 시대를 사는 우리는 보다 더 타인의 시선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간다. 그만큼 타자의 시선은 삶 깊숙이 침투해 있을 것이고,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 우리의 행동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수치심이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치심을 느낌으로써 타인의 공격에 예비할 수 있는 보호 기능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연극은 인류 멸망 보고서처럼, 2023년 1월 수치심을 느낀 사람들의 사망부터 이야기한다. 수치심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유일한 생존자들은 그린피그 일원들뿐이다.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수치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이러한 설정을 안고 시작한다. 그린피그 단원들이 수치심이며, 수치 그 자체가 되는 일화들을 직접 발화하면서 이야기의 씨줄은 하나씩 풀린다. 사이사이 배우들은 '라크리모사'를 합창하면서 애도의 형식을 취하는데 살아남은 자들의 애도라 더 의미 있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애도하는 것은 죽어간 이들이 아닌, 자기 자신과 수치심을 느꼈던 그 순간에 대한 위무로서의 합창인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의 느낌이 나는 그린피그 생존자. 그들이 장착한 수치심을 목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제 관객 밖에 없다. 목격자로서의 관객은 배우 각각의 수치심이 그들을 어떻게 생존하게 했는지, 그들의 미시 역사 안에서 시대의 얼굴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 개별 자아의 발화들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몰염치한 수치심 없음에 대한 고민까지 이어지고(이은성의 산문과 정유정의 사건 등과) 그래서 우리 사회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하게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타자성 - 중첩

배우들은 배우 자신의 이름으로 현실의 자신을 연기한다. 배우이자 경험자로서의 고백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배우들은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고 수치심을 이야기한다. 무대는 현실과 중첩되고 배우는 배우 자신의 삶과 중첩된다. 현실 속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타자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주체되기를 포기한 변방의 목소리는 무대 위에서 오롯이 주체가 된다. 생생함으로 완성된 그들의 목소리에는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넘어선 실랄함을 담고 있다.

무대 역시 중첩의 효과를 충분히 내고 있다. 무대 가운데에는 고급 몰딩이 돋보이는 소파가 있고 그 뒤로 배우들은 관객과 마주한 것처럼 나란히 자리한다. 그들 뒤에는 영상이나 텍스트, 그리고 무대 맨 앞에 있는 카메라가 찍은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이 있다. 후경화 된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것들은 무대 위의 실황이 되기도 하고, 자료화면이나 정유정의 목소리를 딴 텍스트가 되기도 하는데, 무대 맨 앞에 있는 카메라부터 맨 뒤에 있는 스크린까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들이 중첩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무대 위에 연극은 완벽하게 일상의 삶과 분리된 서사가 아니라, 무대 위에 배우들의 얼굴이 카메라와 스크린에, 직접 노출되는 방식으로 중첩되듯이 그들의 이야기도 연극 속에서 연극 인 채로, 삶인 채로 중첩된다. 이 중첩의 내용을 무대는 형식적으로도 재현하고 있는데, 그런 요소들이 효과적으로 드러나서 보는 재미를 더했다.

덧붙여 중앙 소파에는 그물에 담긴 돌무더기가 릴로 연결되어 있다. 수치심의 무게와 생존의 무게, 그리고 각 배우들의 삶의 무게를 짐작케 했는데, 무대 위 소품이라는 약속을 전제하더라도 그 둔중한 형상이 바닥으로 내려오지 않은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은 한편으로 아찔함을 주기까지 한다.



생존자들은 어떻게 생존을 이어가야 할까. 그 수치스러운 순간을 스스로 발화하고, 스스로 기록해 스스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 앞에 더없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관객이자 목격자, 그리고 서로에게 타자인 우리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체이자 타자인 우리들은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수치심 가득한 이야기들이 역사로 자리매김하게 되는지에 대해 목도해야 할 것이다.

 





#역사사비_1월_공동창작

#연출_윤한솔

#제작_극단_그린피그

#출연_김용희_김원태_박수빈_이승훈_정나무_정연종_최지현_목소리출연_송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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